정명 기자 / “김기춘, 조윤선 등의 재판에서 진짜 피해자들의 목소리는 배제되고 있습니다. 오히려 가해자인 공무원들이 피해자로 둔갑해 사건의 본말을 흐리고 있죠”

연극평론가 김미도(서울과학기술대 교수·검열백서위원회 위원장)는 지난 3일 오후 대학로 이음센터에서 열린 ‘청산과 개혁-블랙리스트 타파와 공공성 확립을 위한 대토론회’에서 “블랙리스트 사건은 청와대가 기획하고 국정원이 협조를 받아 문체부가 실행한 국가범죄이며, 국가폭력”이라며 이같이 주장했다. 

그는 블랙리스트 실행과 관련된 특정 공무원들의 이름을 언급한 뒤 “책임을 자신들이 재직하고 있는 기관보다 상위기관, 궁극적으로 청와대에 미루면서 오히려 자신들은 블랙리스트에 저항했다고 변명하기 바쁘다”고 지적했다. 

또 연극연출가를 집요하게 찾아가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지원에 대한 포기각서를 받아낸 공무원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에서 블랙리스트의 실행 책임자로 괴로워하고 있는 사람이자 ‘섬세한 영혼의 소유자’로 세간의 동정을 받고 있다고 토로하기도 했다. 

김 평론가는 이와 함께 “피해자들은 블랙리스트에 이름이 오른 9473명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라며 “단순히 지원에서 배제된 예술가들에게만 한정된 것이 아니다. 수면 위로 드러난 사태는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이날 블랙리스트를 주도한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 조윤선 전 문체부 장관에 대한 결심 공판이 열려 각각 징역 7년과 6년이 구형됐고 역시 블랙리스트 업무에 가담한 혐의로 기소된 김종덕 전 문체부 장관 등에게 징역 5년이 구형되기도 했다. 그러나 블랙리스트 문제는 해결된 것이 아니라는 얘기다. 

김 평론가는 “김기춘, 조윤선 등에 대한 재판이 마무리돼가지만 블랙리스트의 진실은 겨우 그 윤곽을 드러냈을 뿐”이라며 “문체부와 문예위를 비롯한 문체부 산하기관들에서 블랙리스트가 어떻게 구체적으로 실행되고 작동됐는지를 이제부터 구체적으로 밝혀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진상을 낱낱이 밝히지 않으면 일부 공무원들의 행태처럼 가해자들은 끊임없이 진실을 왜곡하면서 피해자들에게 한층 더 가혹한 트라우마를 남길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다. 

그는 “가해자들도 평생 양심의 가책을 씻어내지 못할 것”이라며 “철저한 진상조사와 그에 따른 반성 없이는 블랙리스트의 망령이 언제 다시 살아날지 알 수 없다”고 덧붙였다.

아울러 블랙리스트 작성에 참여한 공무원과 문화예술계 내부 인사들에게 양심 고백을 공개적으로 요구하기도 했다. 김 평론가는 “진정한 사죄와 고백만이 응징과 처벌이 아닌 자유와 화해로 나아갈 수 있다”고 전했다. 

검열백서위원회 조사위원인 극작가 이양구도 이날 “블랙리스트 조사 대상을 청와대와 국정원 등 전 국가기관으로 분명히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앞서 문화체육관광부는 블랙리스트 조사의 빠른 추진을 위해 법이나 시행령이 아닌 훈령을 만들어 조사위를 구성하겠다고 입장을 내비쳤다. 

문화예술계는 하지만 블랙리스트 사태가 범정부적으로 자행된 일인 만큼 철저한 조사를 위해 문체부 내부 훈령보다 높은 단계인 대통령령을 만들어 조사위를 구성해야 한다는 입장을 보였다. 이 극작가가 이 같은 목소리를 다시 한 번 강조한 것이다. 

문체부는 문화예술계와 엇갈린 입장을 확인한 뒤 ‘블랙리스트 진상조사 및 제도개선위원회’(가칭) 출범에 앞서 최근 사전준비팀(TF)을 발족해 문화예술계 지원배제 명단 즉 블랙리스트 사태 재발 방지를 위한 준비에 우선 나섰다. 

이 극작가는 “블랙리스트 사태는 문체부 및 그 산하기관뿐만 아니라, 청와대와 국정원 등이 광범위하게 관여한 사건”이라며 “따라서 조사 대상과 범위를 문체부 및 산하기관으로만 하는 건 적절하지 않다”고 전했다. 

또 “블랙리스트 진상규명위원회는 문재인 대통령의 문화예술 정책 분야 핵심 공약이었던 만큼 최소한 대통령 직속으로 설치되는 것이 마땅하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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