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일 프리뷰를 거쳐 11일 본 공연을 개막한 뮤지컬 '시라노'(연출 구스타보 자작) 한국 초연은 낭만 가객(歌客)들의 '사랑 예찬'이라 할 만하다. 

뮤지컬계에 로맨티스트로 통하는 이들이 모두 뭉쳤다. 올해 데뷔 20주년을 맞은 뮤지컬스타로 이 작품을 통해 프로듀서로 데뷔한 류정한, '꿀성대'의 배우 홍광호, '지킬앤하이드'의 '지금 이순간'을 만든 작곡가이자 넉넉한 외모와 달리 감성을 자랑하는 작곡가 프랭크 와일드혼, 섬세하고 따듯한 음색을 조율하는데 일품인 변희석 음악감독까지 모였다. 

이들이 빚어낸 '시라노'의 화음은 극 중에서 검마저 시(詩)처럼 쓰는 뛰어난 검객이자 로맨틱 언어의 마술사인 시라노의 유려한 언어를 떠올리게 한다. 

세계적으로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 등의 모티브가 된 프랑스의 극작가 에드몽 로스탕의 희곡 '시라노 드 벨쥐락'(1897)이 원작이다. 

평소 자신의 인문학적 소양과 뛰어난 검술로 자신만만하지만 크고 볼품없는 코에 대한 콤플렉스로 인해 정작 본인의 사랑에는 소극적인 시라노와 그가 사랑하는 록산 그리고 이들과 얽히는 크리스티앙이 만들어가는 사랑 이야기다. 

특히 원작의 정서를 그대로 살린 고전적인 대사가 백미로, 극에 품격을 더한다. 시라노가 외모에 자신이 없어 록산이 첫눈에 반한 크리스티앙을 내세워 자신의 마음을 전하는 밤 장면. 커다란 보름달 앞에서 자신의 언어가 아니라 머뭇거리는 크리스티앙에게 왜 이렇게 더듬거리냐고 록산이 묻자, 그를 대신해 시라노가 "내 언어가 당신을 찾아가는 밤길에 익숙해지는 과정"이라고 답하는 등 귓가가 내내 황홀하다. 

시라노가 전장에서 크리스티앙을 대신해 록산에게 편지를 쓸 때 떨어진 눈물 자국을 보고 크리스티앙이 의아하게 여기자 "편지를 쓸 땐 자네 맘이 나의 눈물이 돼"라고 말하는 장면 역시 마찬가지다. 

크리스티앙이 록산을 향한 시라노의 마음을 알게 된 뒤 "남의 영혼을 빌려다 쓰지 않고, 내 온전한 모습으로 사랑 받고 싶다고요, 아니면 차라리 사랑을 받지 못하거나!"라고 말하는 장면 역시 객석을 뭉클하게 만든다. 

다양한 요소를 녹여내는 와일드혼 뮤지컬답게 여러 장르가 뒤섞여 있지만 전체적으로 넘버는 잔잔한 편이다. 시라노의 메인 넘버 '나홀로'의 정서가 와 닿는데 단숨에 귀에 감기는 넘버는 부족한 편이다. 다만 한국 가요와 비슷한 정서를 머금은 멜로디는 익숙하다. 

홍광호는 돈키호테 같은 괴짜의 모습을 보이는 극 초반부터 시라노의 옷을 제대로 입는다. '맨 오브 라만차'의 돈키호테, '오페라의 유령'의 팬텀 등 자신이 출연한 작품들에서 보여준 캐릭터를 총집결, 자신만의 종합선물세트를 선보인데 이어 시라노의 콤플렉스를 사랑으로 승화시키며 그 이상을 동시에 보여준다. '노트르담 드 파리'의 꼽추도 연기한 바 있는 홍광호는 이번 시라노에서도 증명하듯, 외모가 부각되지 않은 캐릭터를 연기할 때도 그 아름다움을 끄집어내는 일가견이 있다. 

원작을 무리 없이 잔잔하게 따라가는 뮤지컬 '시라노' 초연의 초반 공연에서 아쉬운 점은 인물들 간의 개연성이다. 특히 마지막 부분에 록산이 크리스티앙이 죽음 직전 자신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가 사실 시라노가 썼다는 걸 알고 단숨에 그에게 '당신만을 사랑했다'고 외치는 부분은 짐짓 갑작스럽다. 이로 인해 최현주의 발랄하고 청순한 매력에도 록산의 원천적인 매력이 반감됐다. 

시라노가 록산에게 빠져든 세밀한 이유와 록산이 자신도 모르게 시라노의 마음과 영혼에 빠져들고 있었다는 개연성을 조금만 더 보여줬으면, 한결 더 탄탄해졌을 것이다. 1막이 90분, 2막이 60분인데 1막에서 '삐리빠라뽀'라는 주문 같은 노랫말이 잔향으로 계속 남는 넘버 '달에서 떨어진 나'가 극의 흐름과 크게 상관없이 회자되며 몰입을 방해하는 부분도 아쉽다. 

하지만 노래가 주축이 되는 뮤지컬은 사실 선택과 집중의 작품. 시라노의 사랑뿐만 아니라, 용기, 정의, 희생 등 그의 신념에 대한 이야기로 수렴되는 마지막 장면만으로 '시라노'는 충분히 기립 박수를 받을 만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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