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속(光速)으로 휘몰아치는 타임머신을 타고 시간 여행을 한 것 같은 기분이다.

가수 서태지(45)가 지난 2일 밤 잠실 올림픽주경기장에서 펼친 데뷔 25주년 기념 공연 ‘롯데카드 무브ː사운드트랙 vol.2 서태지 25’는 거대한 웜홀(worm hole)이었다. 
 

웜홀은 블랙홀과 화이트홀을 연결하는 우주 시공간의 구멍. 우주만큼 웅장한 무대의 꼭대기에는 모든 걸 빨아들이는 블랙홀을 형상화한 마크가 있고 그 주변을 별처럼 조명이 반짝였다. 모든 것을 내놓기만 하는 천체인 화이트홀은 어디 있는가. 이날 이 대형 타임머신에 탑승한 3만5000명의 머릿속일 것이다. 
 

이날 공연은 서태지의 대표곡을 리메이크한 앨범 제목인 ‘타임 : 트래블러 서태지25’의 타임 트래블러 콘셉트였다. 별들이 모여 사는 은하를 형성화한 영상이 관객들을 압도하는 사이 서태지와 아이들 1집 수록곡 ‘내 모든 것’이 울려 퍼졌다. 
 

8집 수록곡 ‘줄리엣’ 이후 지난 1992년 데뷔곡 ‘난 알아요’부터는 앨범을 발매한 순서대로 셋리스트가 구성됐다. 특히 서태지과 대세 아이돌 그룹 ‘방탄소년단’과 함께 8곡을 내리 꾸며 올림픽주경기장 뒤편 좌석을 가득 채운 10대들의 함성을 이끌어냈다. 
 

‘난 알아요’는 랩몬스터와 슈가, ‘이 밤이 깊어 가지만’과 ‘환상 속의 그대’는 지민 & 제이홉, ‘해가’는 정국 & 뷔, ‘너에게’는 진 & 지민이었다. 서태지는 방탄소년단 멤버들과 돌아가며, 서태지와아이들 시절의 격한 안무를 소화했다. 불혹이 훌쩍 넘은 나이를 의심하게 만들었다. 
 

특히 백미는 서태지와 방탄소년단 일곱 멤버가 다 함께 꾸민 블록버스터 무대인 ‘교실이데아’와 ‘컴백홈’. 특히 ‘교실이데아’에서 8명이 깃발을 함께 흔드는 장면은, 아이들이 줄지어 컨베이어벨트에 오르는 영국의 프로그레시브 록밴드 ‘어나더 브릭 인 더 월(Another Brick in the Wall)의 뮤직비디오가 떠올랐다. 
 

서태지와아이들 시절 청소년 문제에 대한 노래를 발표한 서태지와 ‘학교 3부작’을 통해 현재 청소년 문제에 대한 화두를 던진 방탄소년단의 만남은 뿌리부터 통했던 것이다. 나이와 데뷔 연도 차이가 20년이 넘는 서태지와 방탄소년단 멤버들이 주먹을 맞부딪히고 어깨동무를 할 때 묘한 쾌감을 안겼다. 
 

얄궂게도 여전히 동안인 서태지는 팬들을 향해 “너무 너무 보고 싶어서 지쳤다”며 “음악 하나로 같이 있는 것이 신기하고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도 미스터리하다”고 말했다. ‘필승’에 이어 들려준 ‘굿바이’는 특히 서태지가 지난 1996년 은퇴 당시 만든 곡으로 라이브에서 이 노래를 들려준 건 이날이 처음이었다. 
 

당시 마지막이 될 거라 여겼졌던 앨범 커버에는 ‘&’이 새겨져 있었다. 엔드(End)가 아닌 앤드(And)의 의미로 25주년까지 서태지와 팬들은 이어져왔다. 이날도 스크린에는 &이 등장했다. 이 곡이 울려퍼질 때 그라운드석과 뒤편 객석에 3만5000개의 휴대폰 불빛이 밝혀졌다. 여전히 팬들을 만나고 있는 서태지를 위한 경건한 의식이었다.   
 

음악 종류의 구분이 아닌 콘서트 전체 구성으로 공연의 장르를 가를 수 있다면 이날 서태지 콘서트는 SF였다. 
 

서태지와아이들이 아닌 솔로 서태지로 지난 1998년 발표한 5집 수록곡부터는 무대 앞 전면에 배치된 시스루(see-through) 스크린이 본격적으로 활약했다. 무대 뒷면의 스크린에서 흘러나오는 화려한 영상 효과와 합쳐져 입체적이었다. 우주를 방불케 하는 SF적인 황홀함을 안겼다. 
 

‘테이크 원’ ‘테이크 투’ ‘울트라맨이야’ ‘탱크’ ‘오렌지’ ‘인터넷전쟁’까지 서태지가 지난 2000년대 후반 올림픽주경기장 옆 보조경기장에서 연 대형 록페스티벌 ‘ETP페스티벌’을 방불케 하는 강렬한 사운드로 점철됐다. 
 

사이키델릭한 ‘로보트’에서 서태지의 미성은 보컬이 아닌 장식음처럼 들리기도 했는데 헤비메탈 그룹 ‘시나위’의 베이시스트로 음악을 시작한 그는 솔로 시절에 특히 보컬을 마치 악기군 중 하나처럼 효과적으로 사용해왔다. 
 

불혹이 넘어 본래도 작은 음압이 약하 된 듯 종종 보컬의 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지만 그라운드석과 뒤편 객석 사이에 위치한 딜레이 스피커, 즉 공연장 끝까지 전달하는 소리로 인해 사운드가 울려퍼지는 야외 공연장임에도 소리가 꽉꽉 찼다. 
 

‘제로(Zero)’부터는 지난 2008년 상암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로열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지휘자 톨가 카쉬프와 함께 완성한 ‘서태지 심포니’를 재현했다. 30인조 오케스트라와 함께 지난해 뮤지컬 ‘페스트’에서 서태지의 기존 곡을 압도적으로 편곡한 사운드로 주목받았던 음악감독 김성수가 지휘자로 나서 눈길을 끌었다. 
 

모아이(Moai)’ 초반에는 현악기의 부드러운 소리와 서태지의 미성 그리고 늦여름 밤 산들바람이 뒤섞이며 산뜻함을 선사했다.  
 

최근 앨범인 9집 수록곡 ‘소격동’과 ‘크리스말로윈’으로 본 공연이 마무리 된 이날 공연은 서태지 연출이 돋보이는 2시간40분 동안의 종합 예술이라 할 만했다. 어두운 하늘을 형형색색 물들인 분수 같은 불꽃, 변신로봇처럼 역동적인 움직임을 선사한 조명세트 등은 서태지의 완벽성에 대한 증명이었다. 
 

배철수, 심은셩, 신세경, 아이유, 유재석 & 박명수 등 서태지와 직간접적으로 친분을 맺은 이들의 25주년 축하 영상 메시지가 이어진 뒤 앙코르 첫 곡으로 ‘시대유감’이 울려퍼졌다. 

본래 4집 ‘컴백홈’(1995)에 온전하게 실릴 곡이었다가 노랫말이 사전심의에 걸려 가사를 뺀 채 반주만 실렸고 이듬해 온전하게 싱글로 낸 곡이었다. 검열로 홍역을 앓았던 최근 사회 풍광이 자연스럽게 겹쳐졌다. 명곡은 이처럼 시대를 관통한다. 
 

‘난 알아요’가 이어 심포니 버전으로 다시 선보여졌다. 마치 스페이스 오페라의 시원(始原)을 그린 영화 ‘스타워즈’ 시리즈처럼 고전적이고 웅장했다. 서태지는 왕자에 앉아 이 노래를 불렀다. 
 

드디어 ‘마지막 축제’를 부르자 팬들은 돌출 무대 가운데 있는 서태지를 향해 일제히 노란 종이비행기를 날렸다. 서태지의 첫 번째 솔로 앨범인 5집의 수록곡 ‘테이크5’를 콘서트 무대에서 불렀을 당시 자주 벌인 이벤트다. 팬들을 가만히 쳐다보는 서태지의 얼굴의 표정은 먹먹했다.  
 

25주년 추억을 정리하는데 안성맞춤인 ‘우리들만의 추억’이 마지막 노래가 됐다. 방탄소년단이 다시 무대에 나오고 무대는 다시 꽉 채워졌다. 서태지는 혼자서 늙지 앉았다. 그라운드 한 켠에 30~40대가 된 팬들이 ‘우리만의 추억’ 안무를 열심히 따라 했다. 서태지는 한편,으로는 늙지 않았다. 방탄소년단 팬들로 보이는 10대들 역시 열심히 안무를 따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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