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스 짐머(60, 한스 치머)를 영화음악 작곡가로만 아는건 그를 모르는 것이다.

지난 7일 밤 잠실종합운동장 주경기장에서 펼쳐진 가을 페스티벌 ‘슬로우 라이프 슬로우 라이브’를 통해 첫 내한공연한 짐머의 무대는 광활한 스펙트럼을 자랑했다. 모든 음악 장르를 관장하는 거장이라는 칭호가 걸맞았다. 

2시간 남짓 진행된 이날 공연은 짐머가 참여한 영화 OST로 채워졌다. 하지만 오리지널을 재현한 것이 아닌 다채로운 사운드의 옷을 입고 재탄생했다. 

짐머가 직접 선별한 멤버들로 꾸려진 19인조 밴드가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었다. 영화 없이도 영화 OST만으로 생명력을 얻은 것이다. 짐머 본
인도 건반과 기타를 쉴 새 없이 오가며, 진두지휘했다. 

포문을 연 영화 ‘드라이빙 미스 데이지’ 테마는 멋스런 재즈였다. ‘서클 오브 라이프’를 비롯한 애니메이션 ‘라이온 킹’ 메들리는 아프리카 토속 사운드와 전자 사운드가 그리고 코러스들의 콰이어가 어우러지며 드넓은 음악세계를 선사했다. 

여기까지는 이날 공연의 웅장함을 예고하는 전조(前兆)에 불과했다. 영화 ‘캐리비안의 해적’ 메들리와 ‘크림슨 타이드’의 테마곡의 거대하고 성대함은 프로그레시브 메탈 오페라 장르의 완성이었다. ‘맨 오브 스틸’ ‘배트맨 VS 수퍼맨’ 등 수퍼 히어로물에서는 얼터너티브와 메탈 사운드를 수시로 오갔다. 

‘다크 나이트’ 모음곡을 들려주기 직전 할리우드에서도 활약하는 배우 이병헌이 깜짝 등장하기도 했다.이병헌은 배트맨 시리즈인 ‘다크 나이트’ 시리즈에 대한 이야기와 이 시리즈에서 조커 역으로 강렬한 인상을 남겼으나 스물아홉살의 나이로 지난 2008년 세상을 뜬 히스 레저를 추모했다. 

이후 들려준 ‘인터스텔라’ 메들리, 앙코르로 선보인 ‘인셉션’ 메들리의 몽환적인 사운드는 점층적으로 강렬함과 신비로움을 오가며 올림픽주경기장을 가득 채웠다. 

천장이 터져 있어 사운드 균형을 맞추기 힘든 이 공연장에서 이처럼 다양한 악기를 고르고 선명하게 들을 수 있는 기회도 드물었다. 



이러한 점에는 화려한 세션들도 한몫했다. 차가울 수 있는 사운드에 온기와 열정을 불어넣은 연주를 들려줬다. 특히 전자 첼로를 연주한 티나 구오 화려한 무대와 섹시함이 일품이었다. 

그는 ‘본인의 인생을 영화 장르에 비유해달라’는 물음에 “단연코 어드벤처물이 될 것 같다”고 말했던 짐머는 공연 자체도 대형 어드벤처물로 승화시켰다. 영화음악이 영화 영상에 기대지하고도 화려한 모험담을 선사할 수 있다는 걸 증명했다. 그는 첫 내한에서 관객들과 소통에도 적극적이었다. 마이크를 자주 잡고 멤버들을 소개했다. 연인인 공연 스태프의 공개 프러포즈를 주선하기도 했다. 

짐머에 앞서 ‘위플래쉬’ ‘라라랜드’의 음악감독인 저스틴 허위츠(32)가 포디엄에 올라 지휘봉을 들었다. 뮤지컬 영화 ‘라라랜드’ OST에 참여한 재즈 밴드와 함께 한국의 디토 오케스트라가 참여한 이날 무대는 ‘라라랜드’ 전편을 상영하면서 음악은 라이브로 들려주는 ‘필름 콘서트’ 형식으로 진행됐다.  

이미 많은 관객이 여러 번 관람한 영화지만 음악이 중요한 작품인 만큼 실제 영화 속 음악이 현실에서 라이브로 흐르니 감동이 배가 됐다. 

라이브 연주가 주는 미묘한 선율에는 뛰어난 영화관 입체 스피커 시스템과는 차별되는 감동과 울림이 있었다. 미아(에마 스톤)와 세바스찬(라이언 고슬링)의 탭 댄스 장면에서 울려 퍼지는 ‘어 러블리 나이트’, 두 사람의 인생과 상상이 아련한 동화적으로 압축된 에필로그 장면의 선율이 특히 가을 초입 밤 관객들의 마음을 뭉근하게 적셨다.   

허위츠는 데이미언 셔젤과 함께 만든 비교적 규모가 작은 자신들의 영화에 큰 사랑을 보내준 한국 관객들에게 거듭 감사하다는 인사를 전했
다. 

한편, ‘여유로운 삶의 발견’을 모토로 내세운 이날 페스티벌은 다른 음악 축제에 비해 느긋하게 진행이 됐다. 허위츠와 짐머 공연 사이에 무대 체인지 등을 위해 인터미션 85분을 두는 등 관객들이 여유를 부릴 수 있는 시간이 비교적 많았다. 관객들은 잔디밭에 돗자리 등을 깔고 여유 시간에 책을 보거나 스마트폰으로 영상을 보면서 추석 장기간 연휴의 끝무렵을 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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