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를 대표하는 여성 화가 마리 로랑생(1883-1956)은 1·2차 세계대전의 풍랑 속에서 영화나 연극보다 더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예술가였다. 

프랑스 천재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의 명시(名詩) ‘미라보 다리’의 실제 주인공으로 당시 떠들썩한 연애로 화제에 올랐던 인물이다.
 

하지만 그녀는 입체파와 야수파가 주류이던 당시 유럽 화단에서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자신만의 독창적인 스타일을 완성한 화가다. 지난 1920년대 전 세계에서 가장 사랑받는 초상화가로서 명성을 떨치며, 여성 예술가로서의 위상을 확고히 했다. 
 

약 100년전 마리 로랑생은 미술교육기관인 아카데미 앙베르에서 입체파의 창시자로 불리는 조르주 브라크에게 재능을 인정받으며, 본격적인 화가의 길로 들어섰다. 
 

이후 전 세계에서 파리로 몰려든 젊은 예술가들의 아지트이기도 파블로 피카소의 작업실인 세탁선(洗濯船: Bateau-Lavoir)을 드나들며, 기욤 아폴리네르, 막스 자코브, 앙리 루소 등과 어울리며, ‘입체파의 소녀’ ‘몽마르트의 뮤즈’로 불리며, 주목받았다. 
 

마리 로랑생은 세계 미술사에서 마크 샤갈과 더불어 색채를 가장 아름답게 표현해낸 작가로도 꼽힌다. 무엇보다 색채에 대한 자신만의 매혹적인 감각으로 사람들을 매료시켰다. 황홀한 핑크와 옅은 블루, 청록색, 우수가 감도는 회색 등은 마리 로랑생의 작품을 보면 누구나 한 번에 알 수 있도록 만들었다.

“나를 열광시키는 것은 오직 그림이며, 그림만이 영원히 나를 괴롭히는 진정한 가치이다“ 
 

지난 1920년대부터 1930년대까지 10년간 그녀는 예술 활동에 집중했다. 명사들의 초상화 주문이 끊이지 않았고 의상과 무대 디자인은 물론 도서와 잡지 표지에 이르기까지 그녀를 필요로 하는 이들은 넘쳐났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을 전후로 악화된 건강과 사회적인 고립으로 인해 마리 로랑생의 작품은 정형화되기 시작한다. 지난 1950년대 그녀의 작품은 완전히 잊혀지지는 않았으나 지난 시대의 유물처럼 여겨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작가는 일흔이 넘은 나이에도 매일 캔버스 앞에 앉아 그림을 그렸고 죽기 며칠 전까지 “내게 그림을 그리는 재능이 더 있었더라면!”이라고 탄식할 정도로 예술 혼을 불태웠던 위대한 예술가였다. 
 

지난 1956년 6월 8일 일요일 밤, 심장 마비로 자택에서 숨을 거둔 마리 로랑생은 오스카 와일드와 쇼팽 등이 잠든 페르 라셰즈 공동묘지(Pere Lachaise Cemetery)에 안장된다. 
 

한 손에는 흰 색 장미를 다른 한 손에는 운명적 사랑을 나눴던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에게 받은 편지 다발을 든 채였다.
 

마리 로랑생전이 국내에서 처음으로 선보인다. 예술의전당(사장 고학찬)은 가우디움어소시에이츠, KBS와 공동으로 9일부터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1층에 펼쳤다. 
 

이번 전시는 마리 로랑생을 소개하는 대규모 회고전으로 기획했다. 70여 점의 유화와 석판화, 수채화, 사진과 일러스트 등 총 160여 점을 걸었다.  

 

마리 로랑생이 20대 무명작가이던 시절부터 대가로서 73세의 나이로 죽기 직전까지 붓을 놓지 않았던 시절까지 전 시기의 작품을 작가의 삶의 궤적에 따라 추적해가는 방식으로 구성됐다. 
 

마리 로랑생의 작품에 대해 정금희 전남대학교 미술사학과 교수는 “마리 로랑생은 윤곽선을 없앤 1차원적 평면성과 부드럽게 녹아드는 듯한 파스텔 색채만으로 평안함을 주는 형태를 완성했다”며 “이는 그림을 통해 세상의 고통을 부드럽게 감싸 안으려 했던 작가의 의지가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평가했다. 
 

이번 전시에는 마리 로랑생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쓴 아폴리네르의 시집 ‘알코올’을 비롯해 마리 로랑생이 1942년 출간한 시집 겸수필집 ‘밤의 수첩’ 등이 전시된다. 또 시를 직접 필사해보고 시 낭송을 감상해보는 특별한 코너도 마련돼 직접 체험하는 전시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 
 

연극배우 박정자가 오디오 가이드를 녹음해 삶의 지혜가 녹아든 깊이 있는 목소리로 작품을 소개해 준다. 전시는 오는 2018년 3월11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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