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블 영화’는 현재까지 단 하나의 오스카도 들어올리지 못했다. 마블 스튜디오는 지난 2008년 ‘아이언맨’을 내놓으며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arvel Cinematic Universe) 시대를 열었다.

이후 지난 2016년 ‘닥터 스트레인지’까지 9년 동안 14편의 슈퍼 히어로 영화를 내놨으며, 9차례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 최종 후보에 올랐지만(시각효과상 7회, 음향효과상·분장상 각 1회), 수상과는 거리가 멀었다(‘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VOL. 2’ 2018 아카데미 시각효과상 후보).

마블의 영화들이 오스카 수준의 완성도에 도달하지 못했던 게 결정적이었다. ‘상업·오락’영화로 보면 그들의 작품은 흠잡을 데 없었지만(2008~2017년 매출액 약 14조5000억원·박스오피스 모조 기준), ‘영화’로만 보면 킬링타임 이상의 가치를 갖기 힘들었다. 마블이 뛰어난 기술력에도 불구하고 시각효과 부문에서조차 상을 받지 못한 것도 영화의 완성도와 무관하지 않다.

아카데미에는 마블이 뛰어넘기에는 높은 벽도 있었다. 바로 편견.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다크 나이트’(2008)는 슈퍼 히어로 장르를 넘어선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이 작품은 이듬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실패했다. 남우조연상(히스 레저)과 음향효과상을 받았지만 가장 중요한 작품상과 감독상 부문에서는 후보에도 오르지 못했다. 당시 작품상과 감독상을 모두 차지한 ‘슬럼독 밀리어네어’가 상대적으로 평범한 작품이었다는 건 아카데미가 슈퍼 히어로 장르에 매우 엄격한 기준을 적용한다는 걸 방증했다(물론 놀런 감독에 대한 편견도 있었다).

마블이 지난 16일(현지 개봉 기준) 내놓은 신작 ‘블랙 팬서’(감독 라이언 쿠글러)는 개봉 후 폭발적인 흥행세를 보이며 단 열흘 만에 7억 달러, 약 7500억원을 벌어들였다(제작비 약 2억 달러). 역대 마블 영화 전 세계 흥행 순위 10위에 해당하는 수치다(9위 ‘캡틴 아메리카:윈터 솔져’ 7억1400만달러). 중국에서 개봉하지 않고 올린 성적이라는 걸 감안하면 아무리 못해도 ‘스파이더맨:홈 커밍’(5위 8억8000만달러)의 기록은 무난히 넘어설 것으로 예상된다.

‘블랙 팬서’가 미국 비평사이트 메타크리틱에서 받은 점수다. 흥행 성적보다 놀라운 건 바로 이 수치다. 메타크리틱 평점은 현지 유력 매체 소속 영화 담당 기자들이 각 작품에 매긴 점수를 평균 내 발표하기 때문에 ‘그나마’ 공신력 있는 수치로 불린다. ‘블랙 팬서’ 이전 메타크리틱에서 마블 영화가 기록한 가장 높은 점수는 79점(‘아이언맨’), 가장 낮은 점수는 54점(‘토르:다크 월드’), 평균 평점은 67.1점이었다.

메타크리틱에서 80점을 넘기면 수작으로 평가받는다. 지난해 아카데미 시상식 작품상 후보에 오른 영화 9편의 메타크리틱 평균 점수는 83점이었다(작품상 ‘문라이트’ 99점). 물론 메타크리틱 평점이 영화를 평가하거나 혹은 오스카 향방을 알려주는 온전한 지표라고 할 수는 없지만 ‘블랙 팬서’가 북미 현지에서 얼마나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내년 아카데미 시상식까지 1년이 넘게 남았지만 이때문에 벌써부터 ‘블랙 팬서’가 마블 영화 최초로 아카데미 작품상 최종 후보에 오르는 게 아니냐는 전망도 나온다.

마블의 새 영화가 이처럼 평단과 관객의 고른 지지를 이끌어낼 수 있었던 이유는 역시 완성도가 높았기 때문이다. 서사가 치밀하지 못하고 성긴 부분이 있으나 슈퍼 히어로와 이 장르를 넘어서는 메시지가 제대로 결합됐다는 평가를 이끌어내고 있다. 

뉴욕타임즈는 이번 작품에 대해, “흑인 고유의 상상력과 창조성, 그리고 그들의 해방을 중심에 두고 이야기를 전개해나감으로서 부정돼온 흑인들의 과거와 여전히 변하지 않은 그들의 현재를 이해하게 하는 상징적인 영화가 됐다”며 “아름다운 작품”이라고 말했다.

가디언은 “슈퍼 히어로 영화이면서 슈퍼 히어로 영화가 아닌 작품이며, 체제를 전복하는 로맨스물”이라고 말했다.

상당수 유력 언론은 이처럼 ‘블랙 팬서’를 ‘슈퍼 히어로 장르에서 한 단계 더 도약한 작품’으로 평하고 있다.

이런 호평에는 ‘흑인’이라는 키워드가 있다. 미국 인구의 13.3%인 4200만명은 흑인이다. 그럼에도 미국은 현재까지도 각종 분야에 뿌리내린 인종 차별을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영웅물도 다르지 않아서 MCU에서 중점적인 역할을 하는 슈퍼 히어로는 모두 백인 남성이었다. 이때 나타난 게 바로 마블 최초의 흑인 영웅 블랙 팬서다.

단순히 흑인이라서만은 아니다. 티찰라(블랙 팬서)는 흑인 인권 문제를 놓고 극단적으로 대립하는 매파와 비둘기파를 모두 극복하고 새로운 길을 선택할 정도로 정치적으로 올바르다(두 주인공 티찰라와 에릭 킬몽거의 대립을 마틴 루서 킹과 맬컴엑스의 갈등으로 풀이하기도 한다). 자신의 힘을 함부로 사용하지 않을 수 있을 정도로 도덕적이다. 과거 세대와 미래 세대의 공과(功過)를 용기있게 지적할 정도로 윤리적이기도 하다.

마블은 그들의 첫 번째 흑인영웅을 MCU의 두 축인 캡틴아메리카와 아이언맨을 정신적·신체적으로 뛰어넘는 인물로 설정해 백인 남성 위주로 구성돼온 미국식 영웅주의를 극복한다. 관객과 평단은 ‘블랙 팬서’의 이런 ‘올바른 지향’에 높은 점수를 주며, 열광하고 있다. 

흑인 영웅의 이야기를 흑인 감독과 흑인 배우가 흑인의 문화로 만든 작품이라는 점도 의미를 갖는다. 아프리카를 떠올리게 하는 광대한 자연과 선명한 색상 대비, 전통적인 춤과 의상이 최첨단 기술과 결합한 모습은 인상적이다. 타악기 위주 아프리카 전통 음악과 흑인들이 탄생시킨 장르인 힙합이 어우러지는 OST 또한, 흥미롭다.


◆ 아카데미의 최근 경향…

최근 아카데미가 ‘노예 12년’(2014년 작품상), ‘문라이트’(2017년 작품상) 등 흑인 혹은 소수자와 관련된 작품들을 지지해왔다는 점도 ‘블랙 팬서’의 아카데미 주요 부문 진입 가능성이 높다는 데 무게를 싣는다(물론 두 작품은 흑인이라는 키워드 없이도 뛰어난 작품이었다). 아카데미가 슈퍼 히어로 영화에 가진 편견이 최근 그들의 작품 선택 흐름과 함께 ‘블랙 팬서’를 통해 극복될 수 있을 거라는 분석이다.


◆ 과대평가?

그러나 일각에서는 ‘블랙 팬서’가 과대평가됐다고 말하기도 한다. 마블은 ‘캡틴 아메리카:윈터 솔져’ ‘캡틴 아메리카:시빌 워’ 등에서 보듯 정치 논쟁을 구색 맞추기용 양념으로 곧잘 활용해왔을 뿐 깊이는 없다는 것이다. ‘블랙 팬서’가 건드리는 인종·페미니즘 문제 또한, 다르지 않다는 비판이다.

‘블랙 팬서’ 비판론자들은 지난해 DC엔터테인먼트가 내놓은 ‘원더 우먼’을 이와 비슷한 사례로 들고 있다.

‘원더 우먼’은 관객과 평단으로부터 페미니즘 관점에서 좋은 점수를 받았고(물론 페미니즘 관점에서 제기된 비판도 있었다), 흥행에도 성공했다(전 세계 8억2000만달러). 그러나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는 어떤 부문에도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블랙 팬서’ 또한, ‘원더 우먼’과 마찬가지로 슈퍼 히어로 장르 내에서 볼 때 뛰어난 작품인지는 몰라도 장르를 벗어나서 보면 평범한 영화에 불과하다는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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