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50전 당시 월남 전쟁의 참전경험이 있어 그 당시 치혈하였던 전투로 희생하던 전우들의 모습을 회상하며 현 베트남 에 살고 있는 사랑하는 아들 며느리 손녀들을 보고 싶은 마음에 인천공항에서 베트남으로 출발하는 항공기를 탔다

항공기는 예약대로 시간을 마추워 활주로를 벗어나 상공에서 고도를 잡았다. 나는 1965년 파병하여 1967년 까지 당시 월남 퀴논에 위치한 맹호부대에 00 소대장으로 소대원들과 베트콩(월맹군 계리라) 전투 룰 한 경험과공산주의 이념과 사상 을 가진. 즉“ 베트콩은. 민간인으로 보이는 적의 교묘한 전술로 나에 전우들이 전사하여 군인으로서 명예를 앉았지만 시신 되여 고국으로 돌아가는 것을 보았고 한순간이라도 나의 생명과 소대병력에 승리를 하기위해서는 방어를 최우선으로 하고 전투 준비가 되어있지 않으면 베트콩들에게 나에 목숨도 빼앗겨야 하는 상황이 군인으로서 전투였다!

그러나 나는 국가에 부르심을 받고 자유의 십자군으로서 또한 국가경제발전에 도움이 되고 대한민국의 군인으로서 용맹을 떨치며 죽음도 불사하였다.

하지만 나는 베트남에서 군 생활 만기로 귀국 을 한지50여년이 흐른 지금 지구가 공전하듯. 우리나라와 베트남이 국교가 수교된 이후 내 아들의 아버지가 젊은 시절 사상과 이념이 달라 피와 땀을 흘렸던 베트남에 사업차 살게 되여 자식들의 생활에 걱정과 사는 것이 불안한 점. 눈에 보이지 않는 적과 싸우던 때를 회고하며 호치민 공항에 비행기가 도착하여 내렸다

눈에 제일먼저 보이는 것은 군대 생활당시 월맹군의 군복에 붉은 견장과 별을 보는 순간 마음이 불안하였다 하지만 그 심정은 과거에 심적 유물인 불안이 지금까지 머릿속 에 잠재하고 있는 것을 실감했다

공항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마중 나온 가족들이 내가 나오기만 기다리고 있는 모습을 본 나는 군복에 붉은 견장 과 별을 단 사람은 까 막게 있고 간단한 통관절차를 끝내고 공황을 나와 아들 손녀들에 환영을 받으며 공항로비에서 잠시 쉬었다가 공항택시를 탔다.

호치민시의 밤거리는 언제 전쟁을 한나라냐고 할 정도로 변화 되어 길가에 밝은 가로등 .점포에는  네온 싸인 이 반짝 거리였다 되어 참으로 상상 못할 정도의 변화였다

공산주의 사회이면서도 자본주의사회와 병합된 정치를 한 보람이 이라고 생각을 하며 아들의 집으로 들어와 여장을 풀고 잠을 청하려하였지만 잠이 오지 않아 잠을 설치고 아침 일찍 일어나 아파트정원에서 산책 을 하였다. 주변조경은 열대의 식물로 신귀하며 자연스러워 보였다.

그때어디에선가 뱃고동소리는 누구인가를 부르는 것 같은 은은하고 멀리 뛰는 소리였다 아이들도 잠에서 깨여 아버지를 찾아와 아침식사는 외식을 하자고하여 베트남우동을 먹게 되었는데 음식의 향내는 입에 맞지 않았다.

그래도 베트남에서 처음 먹는 아침식사라 맛이 있게 잘 먹고 아들과 며느리에 권유로 메콩 강으로 관광을 떠나 메콩 강. 선창에 도착하는 것이 먼. 여정 이었다.

도로가에 야자수 바나나 그리고 베트남 열대의 고유의 식물들 야자수 잎으로 만든 움막 같은 집의 지붕 열대에서 시원함은 최고인 듯이. 집들 사이에  나무가 서있고 나무에는 이름 모를 과일과 아름다운 꽃들이 더위에 지친것 같으면서도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다

우리나라는 12월 한겨울인데 그곳은 모내기가 한참 이었다 우리는 몇 시간을 더 달려 메콩 강에 도착하여 작은 배를 빌려 식당으로 찾아 가는 샛강 물길은 흙탕물이지만 아름다웠다 시골의 환경 변화된 모습 양쪽강가에는 야자수 나무와 이름 모를 나무들이 태양을 가린 샛강 을 따라 얼마나 갔는지 그곳 사람들은 흙탕물에서 고기를 잡고 수영을 하며 즐거워 하는 모습 이였다

나는 50년 전 월맹군과 전투를 하던 생각이 회상 되어 불안한 심정이었는데 아이들은 지난전쟁이 무엇인지모르고 마냥 줄 거운 모습이다 얼마나 더 가서 식당이라고 배에서 내리자고한다 식당으로 가는대 몹시도 뜨거운 날씨였다 식단에는 생선튀김 닭튀김 월남쌀밥 전에 먹어 본적이 있어 맛은 알지만 심적으로 불안감을 느끼게 되여 이곳을 빨리 떠나고 싶은 마음 이었다

내가 돌아오는 길에 눈에 보이는 것은 크고 작은 공장들 그것은 우리나라 사업가들이 무한경쟁의 사회에서 어려움을 탈피하여 후진국에서 돈을 벌겠다고 만들어 놓은 것이다 우리교민들은 애국자들이 많다 길가 공터에는 많은 건설 중장비 들 대부분이 우리나라에서 중고장비를 수출 한 것이다. 

그러나 베트남의 현재 재정이나 국력보다 앞서간 장비들이었기에 주인을 기다리며 사용할 때를 기다리는 것 같다.

나는 집으로 돌아와 이틀 밤을 자게 되어 더위를 식히려고 밖에 나가니 식당마다 한국 사람들이 많은 것을 보고 이곳도 삶의 경쟁은 한국과 같다는 것을 실감했다 다음날 아침이 되니 구찌동굴 (베트남전쟁기념관)을 가기로 하여 그곳 도착한 시간 낯12시 점심시간이 되여 식당으로 가니 그곳은 자연스러우면서도 고급스러워보였다 식당 밑으로는 흙탕물이지만 강물이 흐르고 파란 풀들이 무성하게자라고 언덕 위 후박나무에 개수를 셀 수 없이 매달  여 있는 나무 밑에서 손녀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전쟁기념관으로 가보니

50년 전 월맹 군인들의 생활이 묘사 되여 있으며 월맹군 총사령관호치민이 전투지휘를 하던 곳이다. 

또 한밤을 자고 아침이 되니 아들이 하고 있는 사업장이 캄보디아 국경에 있어 그곳에 도착을 하니 국경선하나로 이민국 사무실이 있어 여권 확으로 왕래가 된다. 그곳에서 우리는 기념촬영을 하고 아들의 사업장을 가보니 내부공사가 한참 진행 중인 것을 보니 가슴이 조여 오는 것 같으면서도 희망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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