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 註 : ‘나라는 반드시 스스로 기운 뒤에야 외적이 와 무너뜨린다(​國必自伐 而後人伐之, 국필자벌 이후인벌지).’ 

나라 안이 병들어 스스로 기울어지고 있을 때에만 적이 쳐들어오고, 그렇게 해서 나라가 무너진다는 뜻이다. 맹자(孟子) 이루편(離婁篇)에 나오는 구절이다.

대한민국은 지금 역사적 전환점을 지나가고 있다. 북한 핵무기와 글로벌 통상전쟁의 파장으로 인해 야기된 오늘의 한반도 정세는 1백여 년 전 조선을 둘러싼 청⋅일⋅러 등 주변 열강들의 각축 속에서 끝내 질곡(桎梏)의 시대를 맞았던 한말(韓末)의 형세를 돌아보게 한다. 누가 우리를 질곡과 남루(襤褸)의 시대로 밀어 넣었던가? 남의 탓이 아니다. 인정하기 불편하지만, 그것은 우리 민족성의 밑바닥에 내재한 고질적인 분열주의와 분별력 부족 때문이었다. 

정치 지도자들은 자신만이 옳다는 시야 좁은 아집 때문에 사리분별을 못했고 여기에 계파주의와 금도(襟度) 잃은 패거리들의 밥그릇 싸움이 더해졌다. 이와 같은 인자(因子)가 어느 사이 이 땅의 풍토병이 되어버렸다. 

역사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는 민족은 미래가 없다고 했다. 내년 2019년은 민족적 국권회복 의지가 지층을 뚫고 활화산으로 표출되었던 3⋅1독립만세시위와 그 의지를 모아 수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탄생 1백주년이 되는 해이다. 역사의 숨 가쁜 고비에서 우리는 아집과 분열과 분별력 없는 착시(錯視)를 일삼다가 끝내 국망(國亡)을 맞아야 했었다. 

이 연재물은 우리 민족사에 위대한 불꽃으로 연면(連綿)히 빛나는 3⋅1독립만세시위와 임정(臨政) 수립 백주년을 앞두고 한말과 일제강점기의 불꽃같은 국권회복 투쟁사를 재조명해보기 위해 기획되었다. 

이 글은 지난 1991년 소련 체제가 무너지고 세계 공산주의가 사실상 퇴조한 이후 러시아⋅중국⋅일본⋅미국 등에서 기밀 해제되어 공개된 옛 극비문서들을 통해 새롭게 밝혀진 사실(史實)들에 의거, 지금까지 사실과 다르게 잘못 알려져 왔거나 불분명했던 독립운동사의 많은 부분을 보완, 재정리한 내용이다.



만주와 극동러시아의 조선독립운동사


일찍이 가난과 굶주림에 지친 수많은 조선 농민들이 새로운 경작지를 찾아 남부여대 어린 자식들의 손을 이끌며 고산준령을 넘고 강을 건너 옛 조상들의 고향이자 당시에는 주인 없는 황무지나 다름없었던 만주(滿洲)와 극동러시아 지역 연해주(沿海洲) 땅으로 흘러들어갔다. 

그리고 그 후 일제가 국권을 강탈해 나라가 망하자 수많은 조선 독립지사들이 빼앗긴 조국의 주권을 되찾기 위해 이 혹한의 황량한 이역으로 망명해 생사의 지경을 넘나들며 투쟁하다가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스러져 갔다. 

가난과 굶주림에서 벗어나기 위해, 또는 빼앗긴 조국의 주권을 되찾기 위해 고향과 이웃을 뒤로 하고 러시아 원동(遠東)지역이나 만주지역으로 망명해야만 했던 조선인들의 유민사(流民史)는 한마디로 통사(痛史⋅아픈 역사)로 규정된다. 

주린 배를 움켜쥐고 찾아든 선대들의 서러운 개척사와 이역의 이름 모를 산야에 뼈를 묻어야 했던 구국지사들의 피맺힌 투쟁사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는가. 아득한 옛날도 아닌 최근세사, 민족의 눈물겹고도 실로 위대한 그 발자취에 대해 우리는 너무 무심하다.

극동러시아 연해주 지역과 중국 동북삼성(東北三省)은 본디 한민족(韓民族)의 고토(故土)로서, 고조선(古朝鮮)⋅동부여(東扶餘)⋅고구려⋅발해(渤海)의 영토, 곧 우리 민족의 땅이었으며, 일제강점기에는 가장 치열한 해외 항일독립운동의 전진기지이기도 했다.

러시아 극동지역은 ‘연해주’로 불리던 프리모르스키 크라이(크라이는 지방이라는 뜻)와 하바로프스크 크라이⋅아무르 주(중국명은 헤이룽⋅黑龍) 지역이며, 중국 동북삼성은 랴오닝 성(遼寧省), 지린 성(吉林省), 헤이룽장 성(黑龍江省) 등 ‘만주’로 불리던 지역을 일컫는다.

19세기 중반 이래 가족을 이끌고 만주와 극동러시아 지역으로 흘러들어가 광활한 미개척지를 새로운 삶의 터전으로 개척한 조선의 많은 농민들은 가난하고 힘없는 약소민족의 나라 조선의 첫 디아스포라(diaspora⋅고국을 떠나 흩어진 유민)였다. 

19세기 말엽에 이르러서는 일본의 침탈로 국권이 기울면서 급기야 대한제국(大韓帝國)이 일제에 병합되자 수많은 지사(志士)들과 의병(義兵)들이 독립운동을 위해, 혹은 일제의 수탈과 박해에 시달리던 농민들이 본격적으로 만주와 연해주 지역으로 이주해 갔다. 

당시 한반도의 힘겨운 현실을 벗어나기 위해 고향을 떠나 대륙으로 이주한 조선인들은 중국 동북3성 지역으로 건너가 정착한 ‘조선족’과 러시아 극동지역의 ‘고려인’으로 크게 나뉜다. 이 가운데 극동러시아 연해주로 건너간 조선인들이 처음으로 정착한 곳이 두만강 건너 한반도⋅중국⋅러시아 세 나라가 맞닿은 국경에서 멀지 않은 프리모르스키(연해주)의 티신헤(地新墟⋅지신허)라는 마을이다.





해외 최초의 조선인 마을 티신헤(地新墟)

 

조선 26대 왕이자 대한제국 황제인 고종이 즉위한 해인 1863년 함경북도 무산(茂山)의 최운보(崔運寶)와 경흥(慶興)의 양응범(梁應範) 두 사람이 이끄는 함경도 농민 13가구 60여 명이 당시 월경(越境)을 엄금했던 국법에도 불구하고 가난과 굶주림을 면해보고자 목숨을 걸고 두만강을 건넜다. 이들이 국경을 넘어 정착한 곳이 러시아 땅 연해주 남부 지금의 우수리스크 지역 노보고로드 만(灣) 구역의 지신허 강(池新河) 근처 기름진 황무지였다. 

이주 조선인들은 이곳에 마을을 개척하고 이름을 지신허 강의 이름을 따 지신허라 했다. 지신허는 본디 중국어 표기로 계심하(鷄心河, 중국 발음은 티신혜)라고 했던 강의 이름이다. 티신헤 강은 현재 비노그라드나야 강으로 명칭이 바뀌었고 지역 명칭도 비노그라드노예로 바뀌었다. 

지신허. 이곳이 바로 러시아와 중앙아시아 각지에 흩어져 살고 있는 50만 고려인 역사의 연원지였던 러시아 최초의 조선인 마을이었다. 그 후 가난과 굶주림에 시달리던 수많은 조선 농민들이 끊임없이 이곳으로 넘어왔다. 

그러던 중 1869년(고종 7년) 음력 7월 강풍과 흙비를 동반한 대홍수가 함경북도 일대를 휩쓸어 큰 흉년이 들었다. ‘기사흉년(己巳凶年)’으로 불리는 이때의 천재지변으로 육진지방은 ‘한줌의 벼도 한 뿌리의 채소도 거둘 것이 없어 굶어죽은 시체가 온 산야에 허옇게 널려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조선의 권력층은 자기들끼리 서로 물고 뜯느라 백성의 참담한 고통을 돌볼 겨를이 없었다. 아사(餓死)의 공포에 쫓긴 함경도 주민들이 대거 국경을 넘어 지신허 일대로 몰려들었다. 러시아 자료에 의하면 1869년 9월 말에서 12월 초에 이르는 약 두 달여 기간에 이 지역으로 이주해온 조선인 농민 숫자가 6천3백여 명이 넘었다.

이들은 지신허로부터 14km 쯤 떨어진 연추(延秋, 얀치헤)마을, 곧 지금의 추카노보 마을을 비롯한 수십 개의 조선인 마을을 개척했다. 한국 근현대사 최초의 국외 이주민인 연해주의 조선인들은 낯설고 거친 자연환경, 현지인의 냉대 속에서 약소민족의 설움을 견뎌내면서 신천지의 불모지를 옥토로 개척해 나아갔다. 러시아 현지인들은 이주해온 조선인들을 ‘고려 사람’이라는 뜻의 ‘까레이치’로 불렀다.

정착 초기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운 힘든 환경을 견뎌낸 끝에 겨우 먹고 살만해지자 언잰가는 반드시 금의환향해 고향에 묻히리라 꿈꾸며 그리던 고국은 일본에 병합되어 고국이라는 존재 자체가 없어지고 말았다. 이들은 민족의식에 눈을 뜨기 시작했고, 어려운 형편에서도 망명해온 독립지사들을 돕고 지원하는 정신적⋅물질적 버팀목 역할을 스스로 나서서 자청했다.

일제강점기 해외 항일독립운동은 주로 중국 상하이(上海)지역과 만주, 러시아 연해주, 미주(美洲)지역 등을 근거지로 하여 이루어졌는데, 이 가운데 항일독립운동이 가장 활발하게 펼쳐졌던 지역이 만주와 러시아 연해주 일대였다. 

특히 발해국의 도읍지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였던 헤이룽장 성(黑龍江省⋅흑룡강성) 닝안(寧安⋅영안) 일대와 중경현덕부(中京顯德府)였던 지린 성(吉林省⋅길림성) 허룽(和龍⋅화룡) 일대, 동경용원부(東京龍原府) 소재지였던 지린 성 훈춘(琿春⋅혼춘)지역,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와 우수리스크를 중심으로 한 프리모르스키 크라이 지역과 하바로프스크 일대 등 극동러시아지역의 독립운동은 괄목할만한 것이었다. 

일제강점기는 한민족에게 있어 나라를 약탈당한 어둠과 고난과 치욕의 시기이면서 동시에 민족 자존감이 최고조로 발현된 불꽃같은 각성의 시기이기도 했다.(계속)




발문

가난과 굶주림에서 벗어나기 위해, 또는 빼앗긴 조국의 주권을 되찾기 위해 고향과 이웃을 뒤로 하고 러시아 원동(遠東)지역이나 만주지역으로 숨어들어야 했던 조선인들의 유민사(流民史)는 한마디로 통사(痛史⋅아픈 역사)로 규정된다. 주린 배를 움켜쥐고 찾아든 선대들의 서러운 개척사와 이역의 이름 모를 산야에 뼈를 묻어야 했던 수많은 구국지사들의 피맺힌 투쟁사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는가. 아득한 옛날도 아닌 최근세사, 민족의 눈물겹고도 실로 위대한 그 발자취에 대해 우리는 너무 무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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