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제국 시위대.
블라디보스토크에 타오른 불꽃

러시아 연해주의 블라디보스토크(Vladivostok)는 한말(韓末)과 일제강점기 동안 한국 독립운동가들의 주요 활동 근거지로서 해외 항일운동의 유력한 중심지였다.

연해주를 비롯한 극동지역이 러시아 영토가 된 것은 1860년 베이징조약(北京條約)에 따라 러시아가 우수리(Ussuri) 강 동쪽, 지금의 러시아 원동지역을 영유하게 되면서부터였다. 2차 아편전쟁(1856~1860) 때 영⋅불 연합군이 베이징을 함락해 청나라의 국가존립이 벼랑 끝으로 몰리자 러시아가 화의(和議)를 주선해 1860년 10월 영⋅불 연합국 측과 청국 간에 베이징조약이 체결되었다. 

청나라는 1차 아편전쟁(1839~1842년)으로 홍콩을 영국에 내어준데 이어 1860년의 베이징조약으로  또다시 주룽반도(九龍半島)를 영국에 할양해줘야 했다. 이때 러시아도 청국에 ‘강화를 알선해준 대가’를 요구, 그해 11월14일 러시아와 청국 간의 베이징협상으로 러시아는 당시 청나라 땅이던 연해주 등 원동지역을 넘겨받았다. 이렇게 해서 지금의 국경선이 확정되었다. 

본디 이 지역은 발해(渤海)의 땅이었다. 발해는 고구려가 멸망한 지 30년이 지난 뒤인 698년 고구려의 정통성을 계승해 건국되어 15대 228년 동안 한반도 북부와 만주ㆍ연해주 등 한국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보유했던 한민족(韓民族)의 국가였다. 그러나 926년 발해가 거란족의 침략을 받아 멸망한 후 이 지역은 거란족과 여진족 등 만족(蠻族)이 할거하다가 1858년 아이훈(愛琿)조약으로 청나라와 제정러시아 양국이 공동으로 관리해왔다. 

1860년대 초에 도시가 형성되기 시작하여 해삼위(海參崴)로 불리어지던 블라디보스토크는 시베리아횡단철도의 시발점이자 러시아 해군 태평양함대(극동함대)의 기지였으며 러시아 남진정책에 따른 태평양 진출의 문호이기도 했다. 1950년 6⋅25 남침 때 소련이 북한에 지원한 T-34 전차 242대가 이곳 블라디보스토크 태평양함대사령부에서 소련 군함에 실려 북한으로 옮겨졌다. 

러시아가 작은 항구도시인 블라디보스토크를 군항으로 만들기 위해 대대적인 공사를 진행하던 1874년 무렵 조선인 유민들이 이 도시에 들어와 볕 잘 드는  언덕에 집단촌을 형성하고 거주하기 시작했다. 해안에서 내륙으로 300m 정도 들어온 이 집단거주지역이 ‘카레이스카야 슬라보드카(고려인 거주지)’라 불렸던 구개척리(舊開拓里) 마을이다. 이곳은 현재 포크라니치나야로 이름이 바뀌었다.

구개척리 마을의 조선인들은 1911년 5월 콜레라 예방을 이유로 러시아 당국에 의해 언덕 너머 2km 정도 떨어진 지금의 하바로프스카야 거리로 이주되었으며, 이 새로운 조선인 거주지역은 ‘신(新)개척리’ 또는 신한촌(新韓村)으로 불려졌다. 

한편, 1904년 2월8일 한반도와 만주의 지배권 확보를 위해 러일전쟁을 일으킨 일제는 그해 8월22일 대한재국과 제1차 한일협약을 체결, 재정⋅외교의 실권을 박탈한 데 이어 1905년 11월17일에는 을사늑약(乙巳勒約⋅을사보호조약)을 강제 체결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접수했다. 그리고 내정을 자문한다며 서울에 통감부를 설치키로 했다. 이듬해 2월 서울에 통감부가 설치되고, 을사늑약 체결을 주도했던 일본 추밀원 의장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초대 통감으로 취임했다. 

일제의 한국 복속화는 거침이 없었다. 1907년 7월20일 일제는 헤이그 밀사사건의 책임을 물어 고종황제를 강제 퇴위시키고 황위를 황태자(순종)에게 넘기도록 했다. 그리고 7월24일 정미7조약(丁未七條約)을 강제 체결하여 지금까지의 고문정치(顧問政治) 대신 대한제국 각 부서에 통감이 임명한 일본인 차관(次官)을 배치, 행정을 통괄하는 이른바 차관정치(次官政治)를 시행하도록 했다. 이에 따라 일제의 조선통감부는 대한제국 각 부처의 실권을 완전히 장악했다.

일제는 대한제국 군대 해산까지 밀어붙였다. 그해(1907년, 丁未年) 7월31일 일제는 순종황제의 명의로 군대해산 조칙을 발표하고 다음날인 8월1일 기습적으로 해산식을 거행했다. 해산식에서 군인들은 계급장이 뜯기는 수모를 당하며 약소민족의 비애와 망국(亡國)의 현실을 온 몸으로 느껴야 했다. 대한제국 군대는 일본군과 시가전을 벌이는 등 격렬하게 저항했지만 사태를 되돌릴 수는 없었다. 

국가보위의 최후 보루인 군대까지 강제해산 당하자 마침내 전국 각지에서 항일의병(抗日義兵)이 들불처럼 일어났다. 대한제국 해산군인들은 이들 의진(義陳)에 합류하거나 의병을 일으켜 항일투쟁을 주도해 나아갔다. 이 때 거의(擧義)한 의병을 정미의병(丁未義兵)이라고 부른다.

대한제국 말기 일본의 조선 침탈로 나라가 기울어져 가자 이 땅의 수많은 사대부 유학자들과 이름 없는 민초들이 스스로 생업을 뒤로 한 채 분연히 떨쳐 일어나 목숨을 돌보지 않고 일제와 싸웠다. 역사는 이들을 의병(義兵)이라고 한다. 

한말의 의병은 일반적으로 을미의병(乙未義兵)⋅을사의병(乙巳義兵)⋅정미의병(丁未義兵) 등 세 시기로 대별하는데, 이들의 활동상은 추후 별도로 다루기로 한다.


을사늑약 체결 당시의 고종황제.


경술국치(庚戌國恥)와 성명회(聲明會) 항쟁

1910년에 접어들면서 한국을 강점⋅병탄하려는 일본의 움직임이 더욱 노골화되고 국망(國亡)이 가시화되자 연해주지역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이범윤(李範允)⋅이상설(李相卨)⋅류인석(柳麟錫)⋅김학만(金學萬)⋅차석보(車錫甫)⋅김좌두(金佐斗)⋅김치보(金致寶)⋅이규풍(李奎豊) 등 민족 지도자들이 그해 8월17일 블라디보스토크 이범윤의 집에 모여 일제의 한국병탄을 저지하기 위한 항일단체를 조직했다. 

단체명은 ‘성피지죄 명아지원(聲彼之罪) 明我之寃)’, 곧 ‘적의 죄를 성토하고 우리의 억울함을 밝힌다’는 뜻을 지닌 성명회(聲明會, 또는 聲鳴會)로 정했다. 총대(總代)에는 국내에서 호좌의진(湖左義陣)을 이끌었던 의병장(義兵長) 출신이자 화서학파(華西學派)의 정통 도맥(道脈)을 승계한 당대의 거유(巨儒) 의암 류인석(毅菴 柳麟錫)이 추대되었다. 일찍이 만주를 거쳐 연해주로 망명해온 류인석은 당시(1910년 초) 극동러시아지역 독립운동가들이 결성한 연해주 의병연합체인 십삼도의군(十三道義軍)의 도총재(都總裁)를 맡고 있었다. 

성명회가 결성된 지 나흘 후인 8월22일 드디어 대한제국 내각총리대신 이완용과 제3대 한국통감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가 한일병탄조약(韓日倂呑條約⋅경술국치)에 조인하고 8월29일 병탄이 정식 공포되어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이로써 1897년 10월12일 성립된 대한제국(大韓帝國)은 무너지고, 1392년 태조 이성계로부터 27대 519년간 이어온 조선왕조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8월23일 블라디보스토크의 ‘다리요카야 우크라이나’ 신문을 통해 경술국치(한일병탄조약 체결)의 비보를 접한 신한촌과 인근지역 수 천여 동포들은 조선인학교에 모여 대규모 집회를 갖고 일제를 성토했고, 성명회 지도급 인사들은 밤을 새워가며 회합을 가진 후 병탄조약의 원천무효와 한민족의 자주권을 주창하는 선언서를 간도⋅연해주에 망명해온 지사 8천624명의 서명을 첨부해 8월26일 각국 정부에 전송, 열강들의 지지를 촉구했다. ‘한국국민위원회 대표 류인석’의 명의로 전송된 이 선언서는 최초의 독립선언서였다.  

각국 정부에 발송한 선언문은 청국에는 한문으로, 미국과 영국 정부에는 영문으로, 기타 열강에는 영문이나 불문, 또는 러시아어로 작성되어 전문(電文)으로 보내졌다. 충청북도 진천 출신으로 헤이그 밀사의 정사(正使)였던 보재 이상설(溥齋 李相卨)이 기초하고 을미의병의 대표적인 의병장 류인석이 보완한 이 선언서는 현재 미국 워싱턴DC의 국립문서보관소에 한문본⋅불어본⋅러시아본이 남아 소장되어 있다.

성명회는 격문을 인쇄하여 극동러시아 각 도시와 만주지역 동포들에게 배포해 결사항쟁을 호소하는 한편 1만 명 병력의 ‘한교(韓僑)독립군’을 결성, 두만강 결빙기에 국내로 진군하여 독립전쟁을 개시하기로 했다. 병탄조약 체결을 전후하여 조선인들이 이처럼 조직적으로 궐기한 것은 연해주의 ‘성명회 항쟁’이 첫 사례였다(9월 27일 자 신문에 계속).


발문 
대한제국 말기 일본의 조선 침탈로 나라가 기울어져 가자 이 땅의 수많은 사대부 유학자들과 이름 없는 민초들이 스스로 생업을 뒤로 한 채 분연히 떨쳐 일어나 목숨을 돌보지 않고 일제와 싸웠다. 역사는 이들을 의병(義兵)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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