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일병탄조약 체결로 나라가 망하자 전국 각지에서 수많은 항일의병(抗日義兵)이 들불처럼 일어나 일제와 맞섰다. 일제는 이들 의병들을 국사범으로 규정해 처참하게 처형했다.

 성명회 해산과 핵심 인사들의 체포 

성명회(聲明會)의 항일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자 일제의 내각총리 가쓰라 다로(桂太郞)가 직접 연해주까지 달려와 조선독립운동가들 중 핵심인사들을 체포해 일본에 넘기라고 러시아 당국을 압박했다. 

가쓰라 다로는 제11, 13, 15대 세 차례 총리를 지낸 일본의 최장수 총리로, 일제의 한국 침탈 과정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러일전쟁(1904. 2~1905. 9), 경운궁(慶運宮·고종황제 양위 후 1907년 순종 1년 덕수궁으로 개칭)에서 체결된 을사늑약(乙巳勒約, 1905년 11월17일. 제2차 한일협약·을사보호조약), 경술국치(庚戌國恥, 1910년 8월29일. 한일병탄)는 그가 총리로 있을 때 이뤄졌으며, 1905년 체결한 ‘가쓰라-태프트 밀약’의 주역이기도 하다. 

러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기울어져 가던 1905년 일본 총리 가쓰라 다로는 그해 7월29일 당시 미국 26대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의 지시를 받은 육군장관(현 국방장관)이자 필리핀의 초대 총독을 역임한 월리엄 하워드 태프트(William Howard Taft)와 도쿄(東京)에서 회담을 갖고 ‘미국의 필리핀에 대한 지배권’과 ‘일본의 한반도에 대한 지배권’을 상호 양해하고 인정하는 비밀협약을 체결했다. 이른바 ‘가쓰라·태프트 밀약’이다. 월리엄 하워드 태프트는 루스벨트에 이어 미국 27대 대통령이 된다.

일본 총리가 연해주까지 달려와 조선인 항일운동 핵심인사들의 체포와 인도를 요구하자 그렇지 않아도 러일전쟁에서 패한 러시아는 일본과의 또 다른 마찰을 피하기 위해 즉각 성명회 및 십삼도의군(十三道義軍)의 간부 20여명을 체포, 투옥했다. 이로써 십삼도의군과 성명회는 유야무야되고 마침내 1911년 초반 해산되고 만다.

 
▲ 경술국치로 국권을 빼앗긴 뒤 덕수궁 석조전 앞에서 대한제국 황족과 일제의 조선총독부 관리들이  함께 사진을 찍었다. 가운데 모자 벗은 사람이 고종, 그 오른쪽이 순종.

연해주의 큰 별 이범윤(李範允)

극동러시아지역에서 한국독립운동의 큰 별로 추앙받은 이범윤(1856-1940)은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이 섭정을 하던 때 대원군의 수족으로 일컬어지던 무위대장 이경하(李景夏)의 둘째 아들로 경기도 고양군에서 출생했다. 

1896년 2월 아관파천(俄館播遷)을 주도한 이범진(李範晉)의 아우이며, 1907년 네덜란드 수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정사(正使) 이상설, 부사(副使) 이준(李儁)과 함께 밀사(부사)로 파견됐던 이위종(李瑋鍾, 이범진의 아들)의 숙부(작은아버지)이기도 하다. 

이범윤의 형 이범진은 고종의 최측근이자 친러파로, 1895년 8월20일(양력 10월8일) 민비(閔妃)시해사건인 을미사변(乙未事變)이 일어나자 울분을 참지 못해 관직을 내던져버렸다. 그리고 심상훈(沈相薰), 이윤용(李允用), 이완용(李完用) 등과 함께 은밀히 아관파천을 계획했다.

아관파천은 1896년 2월11일부터 1897년 2월20일까지 고종과 세자(훗날 순종)가 일제의 위해(危害)를 피해 몰래 경복궁을 빠져나와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한 사건이다. 을미사변 이후 일본의 횡포와 독주가 갈수록 심해지면서 고종은 밤마다 잠을 설칠 정도로 친일세력과 일본군으로부터 끊임없는 신변위협을 받고 있었다. 

이범진은 러시아 공사 카를 베베르(Karl Ivanovich Veber)로부터 협조를 약속받은 후 마침내 1896년 2월11일 새벽 6시쯤 고종과 세자를 궁녀의 가마 두 대에 나눠태우고 건춘문(建春門)을 통과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시키는데 성공했다. 관례적으로 경복궁의 수문군(守門軍)이 궁녀의 가마는 검문하지 않는다는 점을 이용한 것이다. 

이범진 등으로부터 도움을 요청받은 베베르 공사는 아관파천 하루 전인 2월10일 공사관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인천에 정박해 있던 러시아 군함에서 수병 100여 명을 포 1문과 함께 서울로 불러들여 러시아 공사관 주변을 경비하게 했다. 

아관파천 후 고종은 ‘역적’으로 규정한 김홍집 친일내각을 해산하고 친일관료들에 대한 체포령을 내렸다. 

총리대신 김홍집과 농상공대신 정병하(鄭秉夏)는 광화문에서 군중들에게 맞아죽었고, 군부대신 조희연(趙羲淵), 내부대신 유길준(兪吉濬), 법부대신 장박(張博), 훈련대 대대장 우범선(禹範善, 씨 없는 수박을 개발한 우장춘 박사의 부친) 등은 일본으로 도주했다. 

탁지부대신 어윤중(魚允中)은 고향인 보은으로 가다가 용인에서 주민들에게 맞아죽었고 외부대신 김윤식(金允植)은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고종은 아관파천 후 1년여 만에 경운궁(덕수궁)으로 환궁해 1897년 10월12일 대한제국(大韓帝國)을 선포하고 황제 즉위식을 거행했다. 대한제국은 경운궁을 정궁(正宮)으로 삼았으며 시해당한 민비를 명성황후(明成皇后)로 추존했다.

이범진은 대한제국의 법부대신과 주미공사(駐美公使)를 지낸 후 주(駐)러시아공사로 전임되어 독일·오스트리아·프랑스 등 4개국 공사를 겸임했으나 1905년 11월의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박탈되고 재외공관이 모두 폐쇄됨에 따라 공사 직에서 물러나 제정 러시아의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1914년 페트로그라드로 개칭)에 머물다가 1910년 8월29일 한일병탄조약이 공표되자 1911년 1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권총으로 자결, 조국과 운명을 같이 했다. 

당초 1881년 청국이 간도지역을 개발한다며 조선 농민들을 만주지역에서 추방하려하자 조선과 청국 간에 해묵은 간도 영유권문제가 다시 제기되었다. 조선과 청국 간의 국경분쟁의 핵심내용은 백두산정계비문 중 ‘동위토문(東爲土門)’을 둘러싼 논쟁이었다. 조선 측은 정계비에 명시된 국경선인 토문강(土門江)이 송화강(松花江)의 상류인 투먼장(圖們江·도문강)이며 따라서 간도는 조선 영토라고 주장했으나 청나라 측은 ‘투먼(圖們)’이 두만강(豆滿江)의 동어이자(同語異字)라고 주장했다. 

이런 가운데 1900년 6월 청국에서 의화단사건(義和團事件·외세 배척운동)이 일어나 러시아가 건설해 관리하고 있던 동청철도(東淸鐵道)가 파괴된 사건이 발생했다. 러시아는 동청철도 보호라는 명목으로 1900년 7월 말 16만의 대병력을 동원해 만주 전역을 점령했다. 

조정에서는 간도지역 조선 농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1902년 6월 이범진의 아우 이범윤을 간도시찰원으로 파견, 이듬해 7월에는 이범윤을 북변간도관리사(北邊間島管理使)로 임명해 간도지역 조선인에 대한 자치행정을 실시하도록 했다. 간도관리사 이범윤은 간도지방의 조선인 보호를 위해 병영을 설치하고 조선인 포수들로 사포대(私砲隊)를 조직, 러시아군으로부터 신식 연발총을 대량 구입해 훈련시켰다. 


발문

민비(閔妃) 시해 이후 고종(高宗)은 일제의 암살 위협에 시달렸다. 마침내 1896년 2월11일 새벽 6시쯤 고종과 세자는 궁녀들이 타던 가마 두 대에 숨어 타고 건춘문(建春門)을 통과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는 데 

성공했다. 이른바 

아관파천(俄館播遷)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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