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비를 시해한 일본 낭인들이 한성신보(漢城新報) 사옥 앞에서 찍은 사진.

민비(閔妃) 시해사건과 능욕설

1910년 8월22일 한일병탄조약이 조인되어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면서 나라가 망하자 러시아 상트페테르브르크에서 권총으로 자결해 조국과 운명을 같이 한 대한제국의 마지막 외교관이자 일찍이 1896년 2월 아관파천(俄館播遷)을 주도해 고종과 세자를 일제의 위해(危害)로부터 보호했던 이범진(李範晉)은 북변간도관리사(北邊間島管理使)를 역임한 독립운동가 이범윤(李範允)의 형이다.

이범진은 1895년 10월8일(음력 8월20일) 민비(閔妃)시해사건(을미사변·乙未事變)이 일어나자 당시 궁궐 내의 모든 업무를 총괄하는 궁내부대신(서리)으로서 국모(國母)를 지켜주지 못한 책임을 자책하며 스스로 관직을 내어놓고 물러났다. 

민비시해사건은 조선조(朝鮮朝) 5백여 년 역사상 가장 참혹하고 치욕스러운 사건이었다. 일본 자객들은 조선주재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三浦梧樓)의 지시에 따라 한 밤중에 조선의 정궁(正宮)인 경복궁을 기습해 고종의 정비(正妃)인 중전 민씨(1897년 명성황후로 추존)를 겁탈한 후 칼로 난자해 살해했다. 시신은 건청궁(乾淸宮) 뒤편 녹산 숲속에서 장작더미 위에 올려놓고 석유를 부어 불태워 버렸다.

민비는 일찍이 왕으로 등극한 어린 고종 대신 10년 동안 섭정을 하면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러온 대원군을 축출하고 고종의 친정체제를 확립한 ‘고종의 정치적 내조자’로, 조선 권력의 실권자였다. 

민비는 대원군의 쇄국정책을 폐기하고 개혁을 도모했으나, 이 시기는 국내외적으로 대단히 복잡하고 어려웠던 때였다. 

청·일 양국의 내정간섭과 임오군란·갑신정변, 급진개화파와 동학농민군의 도전 등 거듭되는 정변으로 국정은 표류했고, 세도정치와 관리들의 부정부패로 삼정(三政)이 문란해져 백성들은 가렴주구에 신음했다. 삼정은 조선시대 국가재정의 3대 요소인 전정(田政)·군정(軍政)·환정(還政. 정부보유 미곡의 대여제도)을 말한다. 

마침내 농민들이 봉기해 1894년 동학난이 일어났다. 농민반란이 삼남지역을 휩쓸며 거세게 번져나가자 고종과 민비는 청나라에 원군을 요청한다. 

청나라 군대가 진주하자 조선 지배를 꿈꾸고 있던 일본도 기다렸다는 듯 조선에 군대를 파병했다. 

동학난이 진압되자 이번에는 청나라와 일본이 한반도 지배권을 놓고 맞붙었다. 결국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조선에서 청나라 군대를 몰아내고 주도권을 잡은 후 일본 군대를 조선에 주둔시켜놓고 영향력을 확대해나갔다. 


▲ 명성황후의 초상

에조(英藏) 보고서“민비는 강간당했다”

일본은 조선 내정을 간섭하면서 침략의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했다. 민비는 이 같은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러시아와 손을 잡고 반일친러(反日親露)정책을 강화해 나갔다.

육군 중장 출신인 조선주재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는 일제가 조선을 침략하는데 가장 큰 걸림돌인 민비를 제거하기 위해 조선의 친일대신들과 모의한 후 일본인 낭인과 일본 수비대 군인, 일본 공사관 순사들로 구성된 자객단을 꾸렸다. 여기에 유길준, 이두황, 우범선, 권동진, 유혁로, 정난교 등 친일파 조선인들까지 가담했다. 

작전명은 여우사냥. 새벽 네시 경 일본 수비대 2개 중대가 경복궁을 포위한 가운데 자객들은 조선의 왕궁으로 돌입했다. 일본군이 궁궐을 포위했다는 급보를 받은 궁내부대신 서리 이범진은 일본군을 피해 4~5미터인 궁궐 담을 뛰어내려 미국공사관과 러시아공사관으로 달려가 구원을 요청했으나 때는 이미 늦은 상황이었다. 

당시 위해(危害)를 감지하고 있던 고종과 민비는 궁궐 내에서도 가장 깊숙한 곳인 건청궁에 기거하고 있었다. 

궁내로 난입한 자객들은 침입을 꾸짖는 고종의 어깨를 강제로 눌러 주저앉히고 세자의 상투를 잡아당겨 바닥에 내팽개친 후 칼등으로 목을 후려치기까지 했다. 그들은 건청궁으로 몰려가 곤령합(坤寧閣)을 샅샅이 수색한 끝에 궁녀 복으로 위장한 민비를 찾아내 뒤뜰로 끌고 가 칼로 난자해 살해했다. 

민비시해사건이 발생한지 71년 만인 1966년 ‘에조(英臟) 보고서’라는 문서가 일본의 역사학자 야마베 겐타로(山健太郞)에 의해 최초로 공개됐다. ‘에조 보고서’는 민비시해 당시 자객의 한 사람이었던 이시즈카 에조(石塚英藏)라는 자가 지난날 모셨던 일본의 상관에게 보낸 비밀서찰이다. 민비시해사건 이후 70여 년 동안 숨겨져 왔던 이 문서에는 당시 마흔네 살의 민비가 일본 낭인들에 의해 능욕(강간)을 당한 후 시해됐다는 내용이 구체적으로 적혀 있다. 

“무리들은 건천궁 내 깊숙이 들어가서 왕비를 끌어내었고 두세 군데 칼로 찔러 상처를 입혔다. 더 나아가 왕비의 하의를 벗긴 후 강간했고 마지막에는 기름을 부어 시신을 태워 없앴다. 그 외에 궁내부 대신들을 참혹한 방법으로 살해했다.”

에조 보고서의 한 대목이다.

이시즈카 에조는 조선에 오기 전 일본 법제국 참사관을 지낸 인물로, 민비시해에 가담한 후 다음날 법제국 장관 스에마쓰 가네즈미(末松謙澄)에게 이 비밀서찰을 보냈다. 이 문서는 현재 일본국립국회도서관 헌정자료실에 보관 중이다.

일본의 삼류 사무라이들이 한 나라의 지존(至尊)인 왕후를 발가벗겨 겁탈한 후 시해했다는 내용은 일본 역사학계에서 진위 논란이 끊임없이 일고 있다. 

미우라 고로 공사와 노선을 달리하는 정파의 소속인 에조가 미우라 공사를 끌어내리기 위해 능욕설을 조작했을 가능성이 많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당시 정황으로 볼지라도 많은 사람이 지켜보는 소란 속에서 ‘능욕’이 과연 가능했을까?

이시즈카 에조는 일제 자객들이 민비를 시해할 당시 현장에 있었던 20대의 젊은 조선정부 내부(내무부) 고문관이었다고 한다. 조선 조정의 내부 고문이란 월급을 받거나 관복을 입고 입궐하는 정식 직책이 아니라 명목상의 직책이었다. 

(10월4일 목요일 계속). 


발문

민비(閔妃) 시해사건이 발생한 지 71년 만인 1966년 ‘에조(英臟) 보고서’라는 문서가 일본의 역사학자 야마베 겐타로(山健太郞)에 의해 최초로 공개됐다. 이 문서에는 당시 마흔네 살의 민비가 일본 낭인들에 의해 능욕(강간)을 당한 후 시해됐다는 내용이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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