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60년대 한성의 거리 모습.

 이범윤(李範允)은 누구인가

이범윤(李範允. 1856. 5. 3-1940. 10. 20)은 경기도 고양군(高揚郡, 지금의 동대문구 신설동)에서 한성부 판윤, 형조판서 등을 지낸 이경하(李景夏)의 아들로 태어났다. 

법부대신 및 주(駐)러시아공사 등을 지낸 이범진(李範晉)이 그의 형이다. 

부친 이경하는 왕실의 종친인 흥선군(興宣君) 석파 이하응(石坡 李昰應)이 안동 김 씨들의 왕족(王族)에 대한 경계와 감시를 피하기 위해 온갖 멸시와 수모를 감내하면서 파락호 행세를 하고 지내던 춥고 배고픈 시절 흥선군과 어울려 고락을 같이 한 측근 심복이었다. 

당시 흥선군은 초대받지 않은 안동김씨 권문의 잔치에 갔다가 던져주는 음식을 웃으며 주어먹거나 얼굴에 술을 끼얹힌 채 쫓겨나기 일쑤였다.

1863년 철종이 후계자 없이 승하하자 그동안 겉으로는 파락호 행세를 하면서 절치부심 아들을 군왕으로 만들기 위해 왕실의 가장 큰 어른인 신정왕후 조대비(神貞王后 趙大妃)와 은밀하게 교류하면서 치밀하게 뜻을 키워왔던 흥선군은 마침내 둘째 아들 이명복(李命福)을 조선 제26대 왕(고종)으로 등극시키는 데 성공한다. 

흥선군은 왕위에 오른 열두 살의 어린 아들을 대신해 섭정을 맡아 하루아침에 ‘상가 집의 개’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거머쥐었고, 대원군의 심복 이경하는 훈련대장 겸 좌포도대장에 올랐다. 

이경하는 이어 1866년 병인양요 때 한성부 판윤·형조판서·강화부 유수·어영대장·공조판서 등을 역임하면서 군사·경찰권을 장악했다.

무위대장(武衛大將)으로 재직 중이던 이경하는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책임을 지고 면직되어 전라도 고금도에 유배되었으나 1884년 대원군에 의해 풀려나 다시 좌포도대장이 되었다. 

그해 12월에 일어난 갑신정변 때에는 조대비·민비·세자(순종) 등을 아들 이범진(李範晉)의 집에 피난시키기도 했다. 그 이경하의 아들 이범윤이 1902년 북변간도관리사(北邊間島管理使)에 임명되었다. 

간도(間島)는 간도(墾島) 또는 간토(艮土)라고도 불리었다. 풀뿌리를 캐고 개간한 땅, 정동(正東)과 정북(正北)의 한가운데 땅이라는 뜻이다. 사람이 거의 살지 않던 황무지를 이주해온 조선 농민들이 개간해서 삶의 터전으로 삼은 땅이 간도이다. 

북간도(동간도)는 백두산 동북쪽 두만강 대안에 위치한 훈춘(琿春)·왕칭(汪淸·왕청)·옌지(延吉·연길)·허룽(和龍·화룡)지역을 가리키며, 서간도는 압록강과 송화강의 상류, 지금의 지린 성(吉林省·길림성) 창바이(長白·장백) 조선족자치현에 해당되는 곳을 가리킨다. 


▲ 흥선대원군 이하응

청(淸)나라 시조는 조선인이었다는 설(設)

본디 간도를 비롯한 만주지역과 연해주를 비롯한 극동러시아 지역은 한민족(韓民族)의 고토(故土·고향 땅), 즉 우리 민족의 땅이었다. 그러나 청국은 만주 여진족(女眞族)이 청을 세워 중원을 장악하면서 그들의 발상지인 만주지역을 신성시하여 봉금정책(封禁政策·일정한 지역에 들어가지 못하게 막는 정책)을 취하였고, 조선 정부도 청나라와의 관계를 고려하여 이곳에 대한 월경(越境)을 금지해 왔다. 

청나라는 만주 여진족(女眞族)이 세운 금(金)나라를 계승한 중국의 마지막 왕조로, 오늘날의 광대한 중국 영토의 지도를 만들어준 거대한 제국이었다. 

그런데 학계 일각에서는 이 금나라, 곧 청나라가 중국 한족(漢族)이 세운 한족의 나라가 아니라 조선족이 세운 왕조였다는 주장이 설득력 있게 제기되고 있다.

청나라를 조선족이 세운 나라였다고 하면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게 무슨 소리냐고 의아해할 수 있다. 그러나 전혀 근거 없는 주장은 아니라고 한다. 

청 건륭(乾隆) 42년(1777년) 청나라 한림원에서 편찬한 청나라 황실의 역사서 ‘만주원류고(滿洲原流考)’에는 “청나라는 신라를 계승했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신라 왕의 성을 따라 국호를 금(金)이라 한다”는 기록도 있다고 한다. 

또한 송(宋)나라의 역사서인 ‘송막기문(松漠紀聞)’에도 “여진족이 여러 부족으로 나뉘어 있을 때 부족을 통합해 금나라를 건국한 추장은 신라인이었다”는 기록이 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조선조 때 편찬한 고려사(高麗史) 등 몇몇 역사서에는 신라의 마지막 왕 김부(金傅·56대 경순왕)의 장자인 마의태자(麻衣太子·김일)의 후손 김행(金幸) 또는 김준(金俊)이 함보(函普)라는 법명을 쓰면서 함경도 영흥(永興)에 숨어 살다가 여진 땅으로 들어가 금나라를 일으켰다는 기록이 있기도 하다. 

마의태자는 부왕(父王)인 경순왕이 군신회의를 열어 고려 왕건에게 투항하기로 결정할 때 “신라는 화랑(花郞)의 나라이옵나이다. 비록 나약해졌다고는 하나 나라의 존망에는 하늘의 명(天命)이 있는 것이니 마땅히 충신 의사(義士)들과 더불어 먼저 민심을 수습하여 스스로 나라를 지키다가 힘이 다한 연후에야 그만둘 일이옵나이다. 어찌 천년 사직을 하루아침에 넘겨주려 하시옵나이까.” 

이렇게 반대하다가 뜻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어전에서 통곡하며 부왕에게 사별(辭別)을 고하고 망국의 한을 품은 채 서라벌을 떠났다. 

그는 개골산(皆骨山·금강산) 혹은 설악산으로 들어가 바위를 집으로 삼고 마의(麻衣) 초식(草食)하다가 생을 마감한 것으로 전해진다. 

청나라 시조가 조선인이라는 기록의 진위 여부는 앞으로 보다 더 분명한 조사와 연구를 통해 규명되겠거니와 이 글에서는 이쯤에서 각설(却說)하고, 다음 회에서는 본론인 ‘연해주 조선독립운동의 큰 별 이범윤’의 족적을 추적, 나라가 저물어가던 대한제국 말엽과 마침내 일본의 식민 노예가 되어버린 일제강점기에 만주와 극동러시아에서 펼쳐진 불꽃같은 구국투쟁사를 살펴보기로 한다.



발문

만주 여진족이 세운 금(金)나라가 국호를 청(淸)으로 바꿨다. 청국은 오늘의 광대한 중국 영토의 지도를 만들어준 거대한 제국이었다. 학계 일각에서는 이 금나라(청국)가 중국 한족(漢族)이 세운 나라가 아니라 조선족이 세운 왕조였다는 주장이 

설득력 있게 제기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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