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경호 안산시 중앙도서관장 / 해파랑길을 걷기 위해 찾은 오륙도 앞바다에서 불덩어리가 솟아오르려 한다. 해파랑길은 해와 바다의 파랑색을 합쳐서 지어진 이름이다. 부산 오륙도 부터 강원도 고성 통일전망대까지 해안으로 688km (부산 안내판에는 764.2km 표시)이어진 길이다. 해파랑길 부산 구간에는 갈맷길이라는 또 다른 이름이 있었다.

안산시민 40명은 오륙도 해맞이공원 한켠에서 안전을 기원하는 제를 지냈다.  오늘은 오륙도를 출발해서 이기대(二妓臺)와 광안리해수욕장, 동백공원, 해운대를 거쳐 미포까지 17.6km를 걷는 일정이다.

바다에서 모처럼 일출다운 일출을 맞이했다. 장관이다. 벌겋게 달아오르는 동쪽 하늘을 스크린 삼아 느릿느릿 앞으로 나아가는 고깃배가 가슴 속으로 들어 왔다. 내 가슴에도 불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 불은 도전과 열정의 불이었다. 둔덕을 오르는데 문뜩 고은 시인의 <그 꽃>이 떠올랐다. 


내려 갈 때 보았네

올라 갈 때 보지 못한

그 꽃


老시인의 <그 꽃>은 늘 허둥지둥 대며 조급해 하는 나를 침잠하게 한다. 수많은 시간들이 내 삶에 사막을 만들었고, 나는 사막을 뒷걸음으로 걸어가고 있다. 내가 걸어왔던 발걸음을 보면서 걷고 싶은 걸 보니 나도 늙어가고 있는 것일까.

이기대로 가는 길은 바닷물이 바다향기를 불러 와서 콧잔등을 간질거리게 했다. 바다에 걸쳐있는 듯 서 있는 바위가 보였다. 바위는 발걸음을 쫓아가면서 모양새가 변했다. 학술지 「남구의 민속과 문화」에는 부처가 아이를 가슴에 안고 있는 듯 한 모습으로 배들의 안녕을 기원하는 돌부처상이라고도 불렀다. 농바위다.

▲ 송정리 구간

길은 해안을 따라 잘 닦여져 있었고 바닷물은 에머럴드빛을 띄고 있었다. 가슴이 시원해져 왔다. 임진왜란 때 두 기생이 술에 취한 왜장과 함께 바다로 투신하였던 곳이라고 해서 불려 진 이기대 (二妓臺) 구간은 빼어난 절경을 이루고 있었다. 

광안리해수욕장으로 발걸음을 옮기면서 방파제 밑에서 낚시를 하는 사람들, 미역을 따서 옮기는 사람들, 해산물을 정리하는 상인들을 만났다. 바다에서 물질을 하고 나온 해녀에게 “아주머니 저 갈매기 이름이 뭐예요.” 라고 물으니 아주머니는 잘라 말했다. “부산 갈매기!” 안산 대부도 괭이갈매기보다 몸집이 큰 녀석들이 바다 위를 날고 있었다. 갈매기들은 닐 다이아몬드가 부른 <BE>와 조나단 리빙스턴의 영화 <갈매기 꿈>을 떠올리게 했다.  

바닷물이 파도를 몰고 와서 어지럽혀진 사람들의 발자국을 말끔하게 지워 버리는 광안리해수욕장에는 날씨가 차가워서 한산했다. 저 멀리 광안대교가 수평선 위에 포물선을 그리며 서 있었다. 동백섬에는 따사한 햇빛을 받아 성급하게 핀 동백꽃이 초록색 잎에 대롱 매달려 있었고 APEC 정상회담을 했던 자리에는 노무현 대통령 모습이 아른거렸다. 그 누구보다도 자존감이 강했던 분으로 내 가슴 속에 자리 잡고 있다. 동백공원에서 이어 진 해운대 해수욕장에는 <돌아와요 부산항에> 노랫말 碑가 서있었다. 한창 젊었을 때 많이 불렀던 돌아와요 부산항에 가삿말을 흥얼거리며 여유롭게 모래사장을 걷는 여행이 즐겁다. 해운대에는 정월대보름 행사를 위해 달집이 만들어져 있었지만 이미 봄은 성큼 와 있었다.  



젊은이들이 모래 위를 거닐면서 꺄르르 웃는다. 청춘들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내 기분도 달떠진다. 함께 해파랑길을 걷고 있는 일행들은 해운대 모래 위를 걸었다. 저마다 상념에 젖어 있다. 어떤 이들은 추억을 떠올리고 있을 것이고, 또 어떤 이들은 현재를 생각하고 있을 터이다. 여행은 내면의 나를 살찌우게 하는 실행이다. 여행을 하면서 얻는 것은 미래를 그려보는 재미도 있지만 지나간 추억을 회상하는 즐거움도 있다. 해파랑길은 50구간으로 이어져 있으니 긴 여정이 될 것이다. 그 여정을 오늘 시작했고 3년쯤 지나면 통일전망대에 서 있는 나를 보게 될 터이다. 

몇몇이 어울려 소주를 들이켜고 싱싱한 회를 된장에 찍어 냈더니 몸이 나른하다. 삶이 별건가 하는 생각을 하게 하는 오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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