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행산 주필 /  올 들어 평양이 국제적으로 갑자기 주목받는 도시가 됐다. 우리 대통령과 국내 대기업 총수들이 평양을 다녀왔고 집권여당의 국회의원들과 몇몇 장관들도 뒤질세라 서둘러 다녀왔다. 특히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은 6·12 싱가포르 미·북 정상회담 이후 벌써 네 번씩이나 부지런히 평양을 다녀왔다. 평균 한 달에 한번 꼴이다.

이와 관련해 이 난에서는 가벼운 읽을거리로 옛날의 평양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옛 평양은 가무(歌舞)와 시문(詩文)에 능한 명기(名妓)가 많았던 풍류의 고장이자 멋과 따뜻한 정(情)이 살아있는 예향(藝鄕)이었다. 평양명기 하면 우선 한우(寒雨)가 떠오르고 당대 최고의 문장가 백호 임제(白湖 林悌)의 일화 또한, 빼놓을 수 없다.

임제는 조선 선조 때의 관료이자 천재시인으로 과거에 급제해 벼슬길에 나아갔으나 부패한 관료사회와 끝 모를 당파싸움에 환멸을 느껴 입신양명보다는 엉뚱한 기행(奇行)으로 양반사회를 조롱하고 이를 즐겼던 ‘골 때리는’ 아웃사이더였다. 

그가 별 볼 일 없는 외직인 관서도사(關西都事)를 자청해 평양에서 빈둥거릴 때 어느날 한우(寒雨)라는 기생을 처음으로 찾아갔다. 한우는 빼어난 미모에다 시문과 가야금에 뛰어났으며, 지조가 굳어 콧대 높기로 소문이 난 명기였다. 평양감사를 비롯해 숱한 한량들이 그녀를 유혹했지만 누구에게도 마음을 주지 않았다고 한다. 

임제와 기생 한우는 밤이 늦도록 시(詩)를 논하면서 술잔을 나누었다. 술이 여러 순배 돌고 서로에 대한 호감으로 두 사람의 마음이 도도해진 가운데 거나해진 임제가 지필묵을 끌어당겨 일필휘지로 시 한 수를 써 한우 앞에 슬그머니 내밀었다.

‘북천(北天)이 맑다커늘 우장(雨裝) 업시 길을 나니, / 산에는 눈이 오고 들에는 찬비(寒雨)로다. / 오날은 찬비 마자시니 얼어 잘까 하노라.’

북녘 하늘이 맑아 비가 오리라고는 생각 못해 우장을 챙기지 않은 채 길을 나섰더니 오는 길에 눈비가 내렸다. 찬비를 맞아 몸이 젖었으니 오늘밤엔 어쩔 수 없이 언 채로 잘 수밖에 없게 됐다는 내용의 이른바 ‘한우가(寒雨歌)’라는 시조다.

‘찬비’라는 뜻을 지닌 ‘한우(寒雨)’의 이름을 빗대어 “찬비(寒雨)에 젖은 채로 자게 됐으니 이 노릇을 어찌하면 좋으냐”며 은근이 한우에게 수작을 거는 시였다. 한우는 한동안 이 절창의 시를 들여다보다가 붓을 들어 화답하는 시를 써 내려갔다.

‘어이 얼어 잘이 므스 일 얼어 잘이 / 원앙침(鴛鴦枕) 비취금(翡翠衾)을 어듸 두고 얼어 자리 / 오날은 찬비 맛자신이 녹아 잘까 하노라’

내용인즉, ‘어찌 언 채로 주무시겠습니까, 무엇 때문에 굳이 얼어 주무시려 합니까. / 곱고 포근한 비단이불이 있는데 왜 얼어 주무시겠다고 하십니까. / 오늘은 찬비 맞으셨으니 이 몸이 안아서 녹여드리며, 잘까 합니다.’

그대의 언 몸을 원앙금침 속에서 내 몸으로 녹여드리겠다는 내용이다. 누구에게도 마음을 주지 않았던 콧대 높은 명기 한우가 임제의 시재(詩才)를 알아보고 그 한 편의 절창에 녹아내리고 만 것이다. 은유적으로 주고받는 수법이 감칠 나고 멋스러우며, 남녀 간의 수작임에도 속되지 않고 격조 높다. 

임제는 한 순간 스쳐 지나간 바람 같은 존재였다. 한우와 하룻밤을 지낸 임제는 평양을 떠난 후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나 임제를 뜨겁게 사랑했던 한우는 그가 다시 찾아올 날만을 기다리며, 평생을 수절하다가 쓸쓸하게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평양은 잃어버린 옛 예향의 고장이었다. 평양이 지금의 이른바 ‘조선 사회주의혁명의 심장부’라는 끔찍한 불량도시가 아닌, 따뜻한 정(情)과 멋과 로망이 살아 숨 쉬는 도시로 거듭나는 날은 과연 올 것인지, 지금으로서는 답답하기만 할 따름이다.

발문

평양이 지금의 이른바 ‘조선 사회주의혁명의 심장부’라는 끔찍한 불량도시가 아닌, 따뜻한 정(情)과 멋과 로망이 살아 숨 쉬는 도시로 거듭나는 날은 과연 올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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