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을사늑약 체결에 참여했던 한·일 수뇌진.

메이지 유신을 통해 성공적으로 근대화를 이룩한 일본은 해외로 눈을 돌렸다. 일본이 가장 먼저 주목한 나라는 조선이었다. 일본과 지리적으로 가까운 한반도는 일본이 대륙으로 진출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발판이었다. 

당시 조선을 탐내고 있던 나라는 일본만이 아니었다. 중국과 러시아 역시 조선을 노리고 있었다. 청나라는 조선의 종주국이라는 기득권을 잃지 않으려 했고 러시아는 동아시아와 태평양으로의 남진을 위한 거점으로 한반도가 필요했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민란을 진압할 능력이 없었던 조선 조정은 청국에 구원병을 요청했다. 청이 조선에 군대를 파병하자 조선에 대한 청나라의 영향력 확대를 우려한 일본은 즉각 조선에 군대를 상륙시켰고 동학농민운동이 진압된 후에도 청·일 두 나라 군대는 철수하지 않은 채 대치했다. 

이 같은 대치는 결국 청일전쟁으로 이어졌고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만주와 한반도에서의 주도권을 확보했다. 청일전쟁의 패배로 청조는 돌이키기 힘든 상태로 빠져들었다. 그렇잖아도 청나라는 두 차례에 걸친 아편전쟁의 패배와 영국·미국·프량스·러시아 등과의 연이은 불평등조약으로 쇠락의 길을 내닫고 있었다. 

부패한 청조, 열강의 침략, 청일전쟁 배상금 등으로 고통 받던 중국 민중들이 마침내 1899년 배외(排外)운동인 의화단(義和團)폭동을 일으켰다. 폭동은 확대일로를 치달아 중국 전역에서 서양인에 대한 테러가 확산돼 갔다.

의화단사건이 확산되자 러시아는 자신들이 부설해 관리하고 있던 중국 내 동청철도(東淸鐵道)를 보호한다며, 랴오둥(遼東·요동)반도의 뤼순(旅順·여순)항에 극동사령부를 설치하고 압록강 하구의 조선 땅인 용암포까지 무단으로 점령했다. 이 같은 러시아의 남진은 일본의 대륙 진출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1904년 2월8일 일본은 뤼순의 러시아 극동함대를 한밤중에 기습, 러일전쟁을 일으켰다. 전쟁이 한창이던 1905년 1월22일 러시아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피의 일요일’ 사건이 발생해 혁명 분위기가 고조돼 갔다. 러시아는 결국 항복했고 청일·러일 두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조선 조정을 압박해 을사조약을 체결했다.

1905년 11월17일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해 보호국으로 만들기 위해 을사늑약(乙巳勒約, 제2차 한일협약)을 강제 체결할 당시 대신회의의 실무 책임자인 의정부 참찬 이상설은 협약 체결을 막기 위해 회의장 문을 박차고 들어가려 했으나 일본 헌병의 제지로 회의에조차 참석하지 못했다. 

이에 이상설은 고종에게 “사직(社稷)과 함께 할 각오로 을사5적을 처단하고 조약을 파기할 것”을 주청하는 상소를 거듭 올렸다. 결국 을사조약으로 국운이 기울자 전 호조·병조·형조판서, 한성부윤, 군부·내부·학부·외무·참정대신 등을 역임한 시종무관 민영환(閔泳煥)이 죽음으로 항거한 사건이 발생한다.

이상설은 종로 보신각 앞 거리로 나가 군중을 상대로 을사조약의 부당함을 역설하는 가두연설을 한 후 민영환의 자결 순국을 알리고 자신도 돌에 머리를 찧어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했으나 미수에 그쳤다.

상소 같은 전통적 방식으로는 대세를 뒤집을 수 없으며, 새로운 운동방식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이상설은 을사늑약 체결과 함께 관직을 버렸다. 그리고 국내에서는 더 이상 국권회복운동을 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이상설은 우당 이회영(友堂 李會榮)·석오 이동녕(石吾 李東寧)·유안무·야은 장유순(野隱 張裕淳) 등과 숙의 끝에 만주 북간도에 국외 민족운동 기지를 건설하기로 했다. 

이상설·이동녕·정순만(鄭淳萬) 등은 각기 가산을 처분해 자금을 마련한 후 이듬해인 1906년 4월18일 행장을 꾸려 만리절역(萬里絶域)으로 망명을 떠난다. 이상설은 고종의 각별한 신임으로 일신의 영화가 보장된 사람이었으며, 대학자로서 존경 받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는 모든 것을 버리고 험난한 여정의 한 길을 선택했다. 

북간도로 망명한 이상설·이동녕·정순만은 먼저 재만(在滿) 조선인 자녀들의 민족교육을 위해 지린 성(吉林省·길림성) 옌지 현(延吉縣·연길현) 룽징춘(龍井村·용정촌)에 한국 최초의 근대식 해외 교육기관인 서전서숙(瑞甸書塾)을 설립한다. 

서전서숙은 건물 70평에 고등반과 초등반으로 나누어 북간도뿐만 아니라 인근 함경도 등지의 조선인 학생들을 모아 신학문과 항일 민족교육을 실시했다. 교사 월급, 교재비, 학용품 등과 학교 운영비 일체는 이들이 마련해온 사재로 충당했다. 

이상설은 1914년 마흔다섯의 나이에 블라디보스토크에 세워졌던 조선 최초의 임시 망명정부인 대한광복군정부(大韓光復軍政府)의 정통령에 피선되기도 했다. 

▲ 4월 참변 당시 일본군의 조선인 학살 현장.

우수리스크(Ussuriysk)는 ‘축축히 젖은 땅“, 곧 ‘늪지대’라는 뜻이라고 한다. 발해는 영토를 5경(京)·15부(府)·62주(州)로 획정했는데 솔빈부는 15부 중의 하나이며, 명마의 고장이었다. 

러시아 극동 프리모르스키 크라이(Primorskiy krai·沿海洲)의 제2의 도시인 우수리스크에는 보재 이상설(溥齋 李相卨)의 유허비, 연해주 독립운동의 대부 최재형이 만년에 살았던 옛집, 4월 참변 추모비 등의 독립운동 사적이 있다. 이 지역의 중국식 옛 이름은 ‘쌍성자(雙城子)’였다. 

우수리스크는 블라디보스토크 북쪽 112킬로미터, 만주 일대에서 가장 넓은 호수인 중국 령 싱카이 호(興凱湖. 러시아에서는 항카 호·Khanka라 함) 남쪽의 저지대에 위치해 있으며, 항카 호에서 발원한 작은 하천이 중국과 러시아의 경계를 이루다 우수리 강 본류와 만난다. 우수리 강은 중국과 러시아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헤이룽 강(黑龍江·아무르 강)의 지류다.

이곳 우수리스크 일대는 발해가 멸망한 직후 역대 중국왕조의 관할에 있었으나 1860년 베이징조약 체결로 러시아 영토가 되면서 조선인의 이주가 시작된 첫 번째 지역이기도 하다. 

이곳에서 이범윤·이상설·류인석 등이 중심이 돼 십삼도의군(十三道義軍)을 조직했으며, 이상설이 숨을 거둔 지역이기도 하고 연해주 항일투쟁의 큰 별 최재형이 활동하다가 일본군에게 붙잡혀 총살을 당한 곳이기도 하다.

<계속> 


발문

이상설은 고종의 각별한 신임으로 일신의 영화가 보장된 사람이었으며, 대학자로서 존경받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는 모든 것을 버리고 오로지 국권을 되찾겠다는 일념으로 만리절역(萬里絶域) 북간도로의 망명이라는 험난한 여정을 선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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