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산 주광현 말은 혼자 하는 독백이 아닌 이상 상대가 있다. 말하는 화자(話者)는 들어 줄 사람과 의사소통을 위해서 말을 한다. 때로는 말 한마디가 눈물겹게 고마울 때도 있고 어쩔 때는 말 한마디로 인해 평생 등을 돌리는 경우도 있다. 이게 인간사(人間事)다. 

언어는 ‘칼 위의 칼’이라고 표현해야 할 만큼 이롭게 쓸 때도 있지만 위험천만(危險千萬)일 때도 있다. 그래서 언어는 ‘양날의 칼’이라고들 한다. 

어떨 때 위험한 칼이 될까? 우선은 상대방을 무시하거나 가볍게 보고 상대의 역린(逆鱗)을 건드려 말을 할 때 돌이킬 수 없는 견원지간(犬猿之間)의 사이로 바뀌게 된다.

이렇게 언어는 순기능 못지않게 역기능도 만만찮다. 우리 속담에 ‘세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 라고 했다. 습관을 말할 때 자주 인용(引用)되는 우리 속담이다. 

언어는 습관이다. 무엇이나 처음 시작할 때 제대로 배워야 나중에 어려움이 없다. 

말도 처음 배울 때 제대로 배워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학동(學童)기 이전부터 그 후까지 말본새 때문에 자꾸 마음이 쓰인다. 

가정에서 학교에서 어린 시절에 제대로 배우고 제대로 써야 할 말이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어릴 때 잘못 배운 말은 평생을 따라 다닌다. 

말은 그 사람의 인격이다. 어떤 말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저속한 사람으로 평가될 수도 있고 품격 높은 인격자로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

지금은 매스컴의 발달로 말 씀씀이가 옛날 같지 않다. TV는 나이 구별 없이 누구나 즐겨 보고 또 쉽게 접할 수 있는 실내 교육자이다. ‘실내 교육자’ 그렇다. 교육 프로그램이 아닌 데도 불구하고 TV처럼 교육 효과 만점인 시설은 없다. 

보면 쉽게 따라하게 되고 따라 하면 바로 학습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연속극에서 극 중 인물들의 대화 가운데 거북한 반말을 흔히 들을 수 있다.

반말은 대체 뭐 길래 극도(極度)로 날을 세우고 따지려 하는가? 반말은 말 그대로 ‘온 말’이 아니다. ‘반 토막 말’이라는 것으로 풀이 된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 반말의 용례를 아래와 같이 들고 있다.

“너 누구한테 반말이야?/그 아이는 버릇없이 아무에게나 반말을 해 댔다”

반말을 해도 괜찮을 경우에 반말을 하면 그게 문제 될 리 없다. 

그러나 반말을 해서는 안 될 상대에게 반말을 하면 그게 문제가 된다. 연속극 대본을 반말투성이로 쓰는 작가에게도 문제가 있다. 

그런 연속극을 만들어 내는 작가들을 원망하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해 싼 값의 수업료(시청료)로 TV를 보고 배워 익힌 사람들은 반말을 써서는 안 되는 상대에게도 그냥 반말을 쓴다. 

이런 사람들은 TV에서 수업료(시청료+시간 값)내고 배운 것이기 때문에 일상 대화에서 반말은 거침이 없다. 이렇게 학습된 사람들이 어떤 기회에 TV 방송에 나올 때가 있다. 이런 때도 반말은 거칠 것이 없다. ‘배운 도둑질이 어디 가겠는가?’ TV 생방송에 가족들이 출연해 자기 조부모님이나 부모님에게 흔히 하는 반말을 들어 보면 대강 이렇다.

‘하기 싫어. 안 할래. 난 몰라, 누가 아니래? 아빠 사랑해, 난 안 갈래. 엄마가 해. 지금 사 줘. 엄마 사랑해, 할아버지도 그랬어?, 그게 누구라고?’ 등등 가관(可觀)이다.

사람은 언어 예절에서 인간다운 질서가 잡히는 것인데 분별없이 쓰는 반말, 정말 그대로 두고 모른 척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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