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석오 이동녕(石吾 李東寧).

석오 이동녕(石吾 李東寧, 1869. 2-1940. 3)은 1919년 상해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초대의장으로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탄생시킨 주역으로 임정(臨政)이 위기에 처할 때마다 국무총리, 의정원 의장, 대통령 권한대행, 국무령, 내무·군무·법무총장 등을 맡아 위기를 극복하면서 평생을 임정을 주도적으로 꾸려간 독립운동가였다. 

한학자이며, 경상북도 의성(義城) 군수와 영해(寧海) 군수를 지낸 이병옥(李炳鋈)의 장남으로 충남 천안시 목천면(木川面) 동리(東里)에서 태어난 이동녕은 1896년 독립협회에 가담해 간사원에 선출됐으며, 1898년 독립협회 주관 민중집회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 때 이승만(李承晩)·이준(李儁) 등과 함께 투옥돼 7개월간의 옥고를 치렀다. 

이 때 이동녕은 여섯 살 아래인 이승만과 친숙한 동지가 됐다. 

형기를 마치고 출옥한 그는 국문학자이며,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 사람인 이종일(李種一)이 경영하는 민족주의 성격의 한글 일간지 제국신문(帝國新聞, 1898년 8월 창간) 논설위원을 거쳐 월남 이상재(月南 李商在), 상동교회(尙洞敎會) 전도사 전덕기(全德基) 등과 함께 기독교청년회(YMCA)운동을 시작한다. 

1904년 8월 제1차 한일협약(정식 명칭은 한일 외국인 고문 용빙에 관한 협정서)이 체결돼 일본의 고문정치(顧問政治)가 시작되자 상동교회에서 전덕기·양기탁(梁起鐸)·신채호(申采浩)·조성환(曺成煥) 등과 ‘상동청년회’를 조직,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했으며, 이때 김구(金九)·이회영(李會榮) 등과 교유하게 됐다. 

1905년 11월17일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이동녕은 동지들과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연좌시위를 벌이며, 조약 파기를 주장하다가 다시 2개월간의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 신흥무관학교 생도들.

감옥에서 풀려난 후 이동녕은 1906년 북간도 용정촌(龍井村)으로 망명, 이상설(李相卨), 여준(呂準) 등과 함께 용정촌에 한국 최초의 민족교육 기관인 서전의숙(瑞甸義塾)을 설립, 동포 2세들의 항일민족교육을 실시했다. 

1907년 이상설이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로 파견되자 국내로 돌아온 이동녕은 양기탁·이회영·안창호(安昌浩)·이동휘(李東輝)·이갑(李甲)·전덕기·김구·이종일·유동열(柳東說) 등 20여 명과 서울에서 항일비밀결사 단체 신민회(新民會)를 결성, 총서기 직을 맡았다.

또한, 그는 항일구국신문인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新報)의 발행을 지원하는 한편, 민족주의 교육의 산실인 대성학교(大成學校. 안창호와 윤치호 등에 의해 1907년 9월 평양에서 설립)와 이승훈(李昇薰)이 1907년 12월 평북 정주(定州)에 세운 4년제 중등과정의 오산학교(五山學校) 설립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대한매일신보는 영국인 기자 어니스트 토머스 베델이 양기탁, 박은식(朴殷植) 등 민족진영 인사들의 도움을 받아 1904년 7월 창간한 신문으로 발행인이 영국인이었기 때문에 통감부의 검열을 받지 않고 항일논설을 자유롭게 실을 수 있었다.

1910년 8월22일 한일합병조약이 조인돼 조선이 일제의 식민지가 되자 이동녕은 가산을 정리, 그해 겨울 중국 서간도인 랴오닝 성(遼寧省·요녕성, 1931년 관동군이 랴오닝 성을 펑톈 성<奉天省>으로 개칭) 류허 현(柳河縣·유하현) 싼위안푸(三源堡·삼원보)로 망명했다.

이동녕은 이곳에서 이회영(李會榮)·이시영(李始榮)의 6형제 및 석주 이상룡(石洲 李相龍)과 함께 재만(在滿)조선인 자치기관인 경학사(耕學社)와 부설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를 설립하는데 참여했다. 

당초, 1909년 봄 나라가 기울어져가자 신민회 간부들은 대한매일신보 주필 양기탁의 집에서 비밀회의를 갖고 압록강 건너 남만주(서간도) 일대에 국외 독립운동 근거지를 건설해 독립군 양성을 위한 무관학교를 설치하기로 의논을 모았었다. 

이듬해인 1910년 8월 초 신민회 간부 이회영·이동영·주진수(朱進洙)·장유순(張裕淳)·이관식(李寬植) 등이 독립운동 근거지를 물색하기 위해 서간도를 다녀왔다.  이 때 적지로 보아둔 곳이 류허 현 싼위안푸(유하현 삼원보)에서 서쪽으로 약 3~4킬로미터 떨어진 추가가(鄒家街)라는 곳이었다. 

그러나 추가가에 독립군 양성을 위한 무관학교를 설립하려는 계획은 현지인들의 반발에 부딪쳤다. 현지 중국인들은 조선인들이 일본의 세력을 등에 업고 이 지역을 장악하려는 줄로 판단, 조선인에게는 토지나 가옥을 일체 팔지 않았으며, 어떤 시설물도 건축하지 못하도록 했다. 

이회영은 그들에게 “우리 조선인들은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왔다”고 필담으로 설득하는 한편, 총리대신 위안스카이(袁世凱·원세개)를 면담하기 위해 급히 북경으로 달려갔다. 

원세개는 1882년 임오군란 때 북양함대 제독 정여창(丁汝昌)이 이끄는 청군의 일원으로 조선에 온 적이 있으며, 청국 대표로 조선에 체류하고 있을 때 이회영의 부친 이유승(李裕承)과 친교를 맺은 적이 있었다.

이회영은 우여곡절 끝에 원세개의 도움으로 1911년 음력 4월 추가가에 경학사를 설립하고 같은 해 양력 6월10일 빈 옥수수 창고를 빌려 신흥무관학교의 전신인 신흥강습소를 개설할 수 있었다. 

그리고 1912년 음력 6월 추가가에서 좀 떨어진 합니하(哈泥河), 지금의 통화현(通化縣) 광화촌(光華村)이라는 심산유곡에 열여덟 개 교실을 갖춘 신흥무관학교 신축교사가 완성됐다. (계속)

저작권자 © 경기매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