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청소년 그룹홈 운영자 ‘우리집’ 일꾼 마석훈 / 우리 사회에서 무연고 탈북청소년을 보호하고 교육하는 방식은 크게 3가지 형태로 분류 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정부에서 설립 운영하는 한겨레학교 방식이고 두 번째는 민간단체들이 운영하고 있는 대안학교(주간, 기숙) 방식이며, 세 번째는 그룹홈에서 일반학교에 다니는 방식입니다. 
이들 중 어떤 방식이 좋고 대안이 되는가의 논의는 무의미합니다. 탈북청소년 개개인이 처한 상황이 워낙 다양하기에 어떠한 방식을 택하든 본인에게 맞는 적절한 방식을 찾아 학업을 지속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기에서는 그룹홈(공동생활가정) 방식의 특성에 대해 소개하겠습니다. 
그룹홈은 부모나 친지 없이 홀로 남한에 입국한 ‘무연고’ 탈북청소년, 또는 부모가 있더라도 가족 해체나 자녀 방치로 ‘실질적인’ 무연고 상황에 처한 탈북청소년과 그리고 성인 보호자가 함께 작은 규모(7명 내외)의 공동체를 이뤄 함께 생활하면서 교육하는 방식입니다. 천주교에서 운영하는 <꿈사리>나 <나르샤>, 무종교 시설인 안산의 <우리집> 등이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그룹홈의 장점 - 일상(日常)을 같이하는 속에서 이루어지는 자연스런 배움!

그룹홈에서 생활하는 탈북청소년은 성인 보호자와 함께 생활합니다. 또 인근의 일반학교에서 또래 남한 학생들과 똑같이 공부하게 됩니다. 
같이 먹고 자고 놀고 일하고 공부하고 경쟁하고 화해하는 일상(日常)의 모든 경험 속에서 자연스럽게 남한 사회에서 살아가는 법을 익히게 됩니다. 
이것은 그룹홈 방식이 한겨레학교나 민간의 대안학교와 확연히 구별되는 가장 다른 점이며, 가장 큰 장점입니다. 
탈북청소년들끼리만 어울리고 경쟁(?)하는 방식은 남한사회 적응 초기 잠시의 경험으로 충분합니다. ‘탈북’의 아픔을, 서로의 사정을 이해하는 동무들과 이들의 특성에 맞춘 교육환경 속에서 일정기간 위로받을 수는 있지만 남한 사회와 직접적인 부딪침 속에서 자극받고 남한 사람과 당당한 경쟁을 통해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은 그만큼 줄어들게 됩니다.
탈북청소년들은 앞으로 남한 사회에서 배우고 살아가야 하기 때문에, 자라나는 청소년 시절부터 남한 사회에 직접 부딪히면서 배우는 방식이 가장 효과적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또래 친구는 물론 학연(學緣), 지연(地緣), 그리고 또래 남한청소년들이 경험하는 일상사에 대한 ‘공통의 기억’ 같은 남한사회 적응에 꼭 필요한 ‘사회적 자본’도 축적하게 됩니다. 
물론 남한 사회와 직접 부딪히는 경험은 즐거움보다 고통이 더 큽니다. 문화충격에 주눅 들고 나이 어린 동생들과 같은 학년을 다니는데도 학습능력이 부족해 자존심 상하고 어눌한 말투와 행동으로 ‘왕따’ 당하기도 하고 북한과 탈북자 대한 편견 속에서 마음 졸여야 할 일들이 대부분이지만 그래도 어차피 남한에서 살기위해서는 언젠가 치러야할 관문입니다. 
매도 먼저 맞는 것이 낫다고 이러한 과정은 청소년기에 거치는 것이 더 좋을 수 있습니다.
그룹홈 보호자의 가장 중요한 일은 이 과정에서 상처받는 아이들을 위로하는 일입니다. 끝없는 재잘거림과 하소연, 짜증을 들어주고 가끔은 격분해 학교로 경찰서로 찾아가 항의하고 조정하는 일입니다. 
막힌 일들이 해결되는 과정도 아이들에게 자연스러운 교육이 되지만 막힌 일들이 더욱 꼬여 답답해하는 모습도 아이들에게 큰 공부가 됩니다. 
탈북청소년은 ‘남한 사람도 못하는 일이 많다’는 당연한 사실에 오히려 동질감을 느낍니다. 서로가 위로하며, 함께 살아가는 방식을 배우게 됩니다. 같이 모여 사는 집(Home)이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그룹홈의 단점 - 채울 수 없는 결핍과 ‘가족’이 될 수 없는 한계

탈북청소년과 그룸홈을 이뤄 같이 살면서 교육하는 방식의 가장 큰 단점은 대규모 양육시설 보다 더 손이 많이 가고 힘들다는 점입니다. 보호자는 물론 탈북청소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혈육이 아닌 사람들이 ‘가족’을 이뤄 ‘가족’처럼 산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닙니다.
첫째로 힘든 점은 돈이 많이 듭니다. 남한 학생들과 함께 일반학교에 다니는 탈북청소년을 뒷바라지하다보면, 행여 북조선에서 왔고 부모 없는 아이들이라고 놀림감이 될까 염려스러워, 먹고 입히고 공부시키는 수준을 낮출 수 없습니다. 
어느 정도는 또래 남한 청소년들처럼, 부모 있는 아이들처럼 챙기다보면 전체적으로 돈이 너무 많이 들게 됩니다.
먹는데 한(恨)이 된 아이들이라 적어도 먹는 건 맘껏 먹게 하고 또래 대부분이 가지고 있는 핸드폰도 장만해야 합니다. 자기표현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들어가는 피복비도 만만치 않고 ‘구몬’이나 ‘눈높이’, ‘영수학원’은 다녀야 하기에 사교육 학습비도 적지 않습니다. 
또 아이들이 학업보다 특기적성교육에 관심이 많아 태권도, 피아노, 방과후학습, 댄스학원, 특기학원 등으로 들어가는 학원비도 허리를 휘게 만듭니다. 
또 1종 의료보호대상자라 해도 보험이 안 되는 치과진료비에 기아후유증으로 인한 성형비용, 키 작은 것이 안쓰러워 한번씩 먹는 보약이며, 영양제 값도 굵직합니다. 
가끔은 남한 입국 경비로 쓴 브로커비도 해결해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힘든 것은 아이들이 꼭 한번은 돌아가며, 사고(폭행, 기물파손 등)를 치는데 그때마다 합의비로 기둥뿌리가 흔들리게 됩니다. 
이러한 돈을 국가가 지원하지는 않습니다. 북한이탈주민지원재단(남북하나재단) 등을 통해 개별 그룹홈에 지원되는 금액은 총액도 작지만 프로그램 운영비 중심이라 용도에 한정이 있어 이처럼 다양한 수요를 채울 수 없습니다. 
따라서 그룹홈의 탈북청소년 개개인에게 지원되는 기초생활보장비(1인당 40만원 내외)와 후원금으로 해결해야 합니다. 종교시설인 경우 종교재단의 차입금에 의존하게 되지만 우리집과 같은 비종교 시설의 경우는 개별 후원금과 각종 프로젝트 그리고 실무자의 채무로 해결 할 수밖에 없습니다. 
때문에 그룹홈을 오래하면 할수록 빚이 늘어가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렇다고 아이들에 대한 씀씀이를 여타의 시설처럼 줄일 수도 없습니다. 
기대를 줄이고 살기에는 아이들의 삶에 대한 의지가 너무 뜨겁기 때문입니다.
금전적인 어려움보다 더욱 힘든 점은 같이 모여 살지만 결코 ‘가족’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룹홈은 결코 ‘가족’이 될 수 없고 그룹홈의 실무자는 결코 아이들에게 ‘엄마, 아빠’가 될 수 없습니다. 이 부분은 많은 그룹홈 실무자들이 경험하는 한계입니다.
무연고 탈북청소년은 아픔이 많습니다. 북조선에서 잘 먹고 잘 살았으면 왜 남한에 왔겠습니까? 굶주림을 피해 도망다니다 부모친지 다 잃고 온갖 역경 다 헤치고 낯선 남한 땅에 왔지만 현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기엔 아이들이 너무 어립니다. 
때문에 본인들이 받은 상처를 어떻게든 드러내는데 그것을 받아준다는 것이 힘듭니다. 
아픔이란 게 신기해서 스스로는 거를 수 없고 꼭 누구든 받아주는 사람에게 떠넘겨야 겨우 줄어드는 것 같습니다. 
채울 수 없는 사랑의 결핍과 후유증으로 울고 있는 아이들이 안쓰러워 예수처럼 붓다처럼 큰맘을 내어보지만 그 상처를 닦다보면 나도 모르게 더 깊은 어둠에 빠져들어 오히려 아이들에게 되받아치게 됩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70%’만 주자는 생각에 규율을 만들고 회초리를 들고 마음을 닫아걸게 됩니다. 근데 아이들의 입장에서는 그 부족한 ‘30%’가 섭섭한 겁니다. 
부모 있는 남들처럼 살았으면 ‘100%’를 다 받았을텐데 하는 기대를 접을 수 없나 봅니다. 
부모 있는 아이도 100%를 채우는 경우가 드물지만 어린 마음에 그걸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못 받은 부분을 과장하고 더 서러워하고 결국은 드러내게 됩니다. 
가족처럼 사는데 가족이 될 수 없다는 한계를 확인하는 과정은 참으로 끔찍합니다. 전생에 뭔 죄가 있어 이런 일을 하나 싶습니다. 
해서 가끔 아이들이 ‘아빠!’하고 부르면 화들짝 놀라서, ‘쌤!’이라 부르라고 혼내게 됩니다. 그룹홈 쌤은 사람 할 짓이 못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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