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산 주광현
효산 주광현

우리는 지금 자유 민주 시대에 살고 있다. 민주란 무언가? ‘민주’란 학술적인 고급 풀이는 그만두고라도 ‘특권층만’이 아닌 전 국민이 주인이 된 세상이란 말이 아니겠는가? 
인류는 ’자유와 민주‘를 찾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렸는가? 우리는 선열들의 덕으로 참으로 살맛나는 좋은 세상에 살고 있다. 그러하니 어제도 행복이요, 오늘도, 그리고 한 번도 살아보지 않은 내일도 자연스럽게 행복을 구가(謳歌)할 수가 있다. 
자유 민주 시대엔 전 국민이 누릴 수 있는 권리가 참으로 많다. 그 많은 권리 중에서도 제1위는 단연(斷然) 자유이다. 
‘자유’란 무언가? 자유도 간단하게 풀어보면 이렇다. ‘자유’란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이 ‘자유’이다. 그러나 이렇게 좋은 자유도 남에게 피해가 가지 않은 범위 내에서 자유이어야 한다. 그러기에 자유에는 늘 준엄(峻嚴)한 책임이 따르는 것이다.  
자유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무식하게 막 잡아 말하면, 어떤 행위도 ‘행위’ 다음에 ‘자유’란 낱말을 붙이기만 하면 말이 되는 세상이다. 그 많은 자유 중에 ‘표현의 자유’가 있다. 참으로 좋은 말이면서도 재미있는 말이다. 이 말로 간혹 시빗거리가 생기기도 한다. 
예화로 꾸민 ‘갑과 을’의 다음 대화를 들어 보자. 
갑: 왜 하필 거기다 그렇게 해 놓았는가? 
을: 그야 내 자유지. 왜 그래? 
갑: 자유라니 무슨 자유?
을: 몰라서 그래? ‘표현의 자유’지. 그것도 몰라? ‘표현의 자유’를? 
연속 공격하는 ‘을’의 말 펀치에 머쓱해진 ‘갑’이다. 두 사람의 말다툼은 여기까지다.
글쎄, ‘을’의 말대로 ‘표현의 자유’라고만 하면 만사형통일까? 과연 그럴까? 
우스개 얘기가 머리를 스친다. 옛날 필자가 중학교 때 수업 시간에 들었던 코믹한 애기다. 
때는 해방 직후(直後)였다고 한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혹독한 일제강점기 때여서 소나무가 필요해도 소나무는 단 한 그루도 벨 수가 없었다고 한다. 
만일에 무단(無斷)으로 몰래 소나무를 베다가 산감이나 순사에게 들키기라도 하면 큰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느 날이다. 갑자기 해방이 돼 모든 게 자유라고 하니 세상에 이런 좋은 일이 어디 또 있나 싶어 한 농부가 산(山) 주인 몰래 산에 가서 소나무를 베었다고 한다. 
집에서 출발할 때 자기가 작업하는 동안 소에게 풀을 뜯게하려고 자기 농우를 데려가서 산기슭에 풀어놓고 작업을 한 것이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때 산 주인이 나타났다. 
“여보쇼, 왜 남의 산에서 나무를 베요?” 당황한 농부가 가까스로 마음을 진정하고 퉁명스럽게 이렇게 되받아쳤다. 
“뭐요? 당신은 해방된 줄도 모르요? 이제 해방이요, 자유요.” 산 주인은 어이가 없어 대꾸를 못하고 있다가 사방을 둘러보니 지금 나무 베는 사람의 소가 산기슭에서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는 것을 보았다. 
‘옳지 됐다’ 싶어 쾌재(快哉)를 부르고는 농부네 소를 몰고 가면서 하는 말, “소나무 잘 베어 가쇼. 나는 당신네 소를 가져갈 테니…….” 소나무 베던 농부가 내려다보니 산 주인이 자기의 소를 끌고 가고 있었다. 
몹시 당황해, “여보쇼, 왜 남의 소를 끌고 가요?” 그러자, 산 주인이 “나도 해방이요, 자유요.” 했다는 것이다. 
‘자유’란 삶에서 꼭 필요한 빛이다. 그러나 그 빛을 남용(濫用)하면 자기에게 오히려 화가 온다는 것을 깊이 있게 한번 생각해 보면 어떨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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