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메기 덕장
▲과메기 덕장

호미곶(虎尾串)에 도착한 시간은 오전 5시 30분. 어둠이 물러가지 않은 바다 위로 해무가 얹혀져있었다. 대형버스 난방이 고장 나서 새우잠하며, 이곳에 온 여행자들 얼굴에 실망한 빛이 역력하다. 시간이 흐르면서 수평선에 붉은 빛이 바다 위 구름을 헤집고 얼굴을 내밀기 시작했다. 빛이 어둠을 걷어내고 있는 바다는 아름다웠다. 새벽은 늘 가슴을 뛰게 한다.
영일만 호미곶은 한반도 최동단에 위치해 있다. 바다 속에는 오른손이 솟아 있었고 맞은편에는 왼손이 땅을 뚫고 떠올라 있었다. 광장의 왼손과 바다의 오른손은 전쟁과 갈등과 배타적인 지난 천년의 <한 손의 시대>를 청산하자는 의미가 깃들어 있었다. 이 상징물은 2000년 1월 1일 평화와 희망과 번영으로 온 인류가 화해하고 서로 돕고 함께 사는 새천년 두 손의 정신을 형상화해 세워졌다.
한반도 지형은 호랑이 형상 같다고 한다. 호미곶은 호랑이 꼬리 같다고 해 붙여 진 지명이다. 그곳에 연오랑 세오녀 상이 서로에게 눈길을 보내며, 서 있었다.  연오랑 세오녀 기록은 삼국유사에 수록된 설화다. 단군신화가 한국문화의 뿌리를 형성했듯이 이 설화는 오랜 세월동안 포항문화의 큰 줄기를 이뤄왔다. 연오랑 세오녀 부부는 신라 초기 일본으로 건너가 길쌈과 제철기술 등 선진문화를 전파하고 그곳의 왕과 왕비가 됐다고 한다.
오늘은 호미곶에서 구룡포항까지 15.3km 트레킹 일정이다. 바다와 육지는 해일을   대비해서 둑으로 갈라져 있었다. 바다에서는 파도가 넘실거렸고 갈매기가 날았다. 육지에는 바다에서 건져진 오징어와 논에서 걷어드린 벼가 볕에 말려지고 있었다. 해국이 진한  향을 뿜으며,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여유로운 가을이다.
강사(江沙)에 다다르니 조용한 포구에 조각배들이 찰랑거리고 있었다. 강태공이 방어를 바다에서 끌어내며, 좋아라한다. 사람들이 흘려버린 냇물이 바닷물과 합쳐지는 곳에 갈매기들이 몰려 있다. 그곳에서 고기를 낚은 녀석과 또 다른 녀석이 부리를 서로 겨누며, 싸움질을 하고 있다. 사람이 사는 세상에서 흔히 보는 모습이다.
다무포 고래마을에 들어서니 부부가 오징어 내장을 훑고 있었다. “만원에 몇 마리예요?“ ”다섯 마리!“ 묻는 것이 건성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듯이 잘라 말한다. 들판에는 억새가 휘날렸다.
  동쪽 땅 끝 마을에서는 어촌사람들이 해안가로 밀려 온 쓰레기를 청소하느냐고 땀을 흘리고 있었다. 그 옆 두일포에 누워있는 소나무가 기이한 모습으로 발걸음을 잡는다.    구룡포항이 가까워졌는지 과메기 덕장이 보이기 시작했다. 목이 컬컬했던 여행자들이 막걸리 한 잔을 따라주며, 오징어를 쭉 찢어 건넸다. 20여분이면 구룡포항에 다다를 것이라는 동네슈퍼 사장님 말에 다리가 편해져 왔다. 그렇게 언덕으로 올라서니 주상전리가 펼쳐졌다. 
구룡포항이 보이기 시작했다. 근대문화역사거리가 구룡포항 앞에 서 있었다. 돌계단을 통해 언덕 위로 올라서는데 계단 양옆에 네모모양의 돌들이 서 있었다. 희미하게 한자가보였다. 빗돌碑이었다. 뒤에는 시멘트가 덧칠돼 있었다. 이름을 지은 것이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 이름을 새겨 넣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앞면에 써져있는 이름은 이 시설을 재단장할 때 비용을 부담한 구룡포 주민 이름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시멘트로 덧칠돼 있는 뒷면에 일본인 이름을 새겨 놓았다면 친일파들은 없었을까 하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언덕으로 올라서니 그곳에는 4m 높이 석비石碑가 서 있었고 일본인 도가와 야스브로 송덕비라는 안내문이 있었다. 일제강점기에 구룡포 방파제 축조와 도로를 개설한 일본인을 기리기 위해 1944년 설치했다는 송덕비도 시멘트로 덧칠돼 있었다. 옆에는 일제에 항거하다 순국한 선열과 호국영령의 정신을 기리기 위한 충혼탑과 구룡포 어민들의 풍어와 안전조업을 기원하는 제당인 용왕당이 서 있었다.
구룡포항이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에서 한참을 서서 내 민족에 대한 생각에 잠겼다. 일제는 1910년 조선총독부를 한반도에 설치하고 36년 동안 한민족을 핍박하며, 조선을 말살하려 했다. 1945년 해방된 후 우리는 일제에 충성하고 민족을 배반한 행위를 청산하지 못했다. 그 결과 친일세력들은 기득권층으로 행세를 하며, 생계유지를 위해 호구책으로서 친일은 어쩔 수 없었던 일이라는 호구협력론을 폈다. 일제 강점기 시대에 조선인은 모두 일본의 제도와 법률 하에서 삶을 영위했기 때문에 모두가 죄인이라고 하는 전민족공범론을 주장했다. 현재의 한국 자본주의의 발전은 일제시대에 자본이 투입된 결과라는 식민지 근대화론을 주장하기도 했다. 일본인 뿐 만 아니라 그 주장에 동조하는 이들이 염치없다. 참으로 우울하고 후대에 부끄러운 일이다.
문화거리에는 국가유공자의 댁이라는 문패와 일본어로 써져 있는 상점이 있었다. 한 때 인기 드라마였던 <여명의 눈동자> 촬영장이 발길을 잡았다. 일제에게 강제로 전쟁터로 끌려가 총알받이와 위안부로써 서로 사랑했던 남자와 여자의 가슴 아픈 얘기를 다룬 드라마가 떠올랐다.   
아라광장 옆 수협 전광판에는 대게 57%. 오징어 20% 전국최대 생산량이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일제강점기 때에는 포항앞바다에서 잡은 수산물이 얼마나 많이 일본으로 넘어 갔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구룡포항에서 한민족의 근대사를 느끼는 시간을 가졌다. 
아직 철이 아니라서 과메기 대신 광어를 오물거리는 맛이 좋다. 호미곶 막걸리 한 사발 마시니 기분이 좋아 진다. 
(10.26.)

저작권자 © 경기매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