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노라▲'그림으로 만나는 서양사' 인문학 강사▲'벗에게 가는 길' 인문학 공간 대표
안노라 ▲'그림으로 만나는 서양사' 인문학 강사 ▲'벗에게 가는 길' 인문학 공간 대표

1894년 성 스테파노의 날(12월26일), 르메르 시에 있는 인쇄소로 한 통의 전화가 걸려옵니다.

당시 파리 연극계의 별이었던 사라 베르나르의 연극 포스터 주문이었습니다. 모두가 휴가를 떠나고 활자들이 저마다의 이야기를 기록하는 저녁, 홀로 남아 교정쇄 아르바이트를 하던 체코의 어린 이민자는 전혀 다른 아름다움을 가진 포스터를 만들어 냅니다. 

그는 마르고 기계적인 인쇄소에서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꿈을 키워 낸 ‘알폰스 무하’입니다. 당시엔 연극 내용의 포인트나 배우를 가로로 길게 배열하는 형태가 포스터의 정석이었습니다.

무하는 선명한 윤곽선, 자연을 닮은 부드럽고 우아한 곡선과 빈틈없고 섬세한 장식적 배경, 아름답고 신비스러운 여인을 실사 크기의 세로로 담아내었습니다. 

거리에 걸린 포스터는 밤을 지내고 나면 누군가가 뜯어가 무하 그림의 인기를 실감하게 했습니다. 이후 사라 베르나르는 포스터 디자인뿐 만 아니라 무대와 의상 디자인까지 무하에게 의뢰하게 되지요. 무하는 예술적으로도 상업적으로도 커다란 반향을 일으키며, 동시대의 예술가들에게 새로운 지평을 열어 보입니다.  

알폰스 무하(Alphonse Mucha)는 1860년 7월24일 오스트리아의 통치를 받고 있던 모리비아의 작은 마을 ‘이반치체’에서 태어났습니다.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던 부모님의 영향으로 경건한 종교적 환경에서 자라나지만 제국주의의 시대, 강대국에 의해 분열되고 간섭받는 슬라브족의 현실을 뼈아프게 느끼며, 성장합니다. 

그림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던 그는 프랑스로 유학합니다. 프랑스 말로 좋은 시기를 뜻하는 벨 에포크 시대, 즉 1890년대, 프랑스는 평화와 번영을 누리며, 상업적으로 커다란 발전을 누리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런 풍요와 안정을 바탕으로 새로운 예술이라는 ‘아르누보’가 탄생하지요. 머리카락만큼 가늘지만 꽃잎만큼 부드러운 선을 가진 여인들은 그의 천재적인 재능으로 ‘아르누보 양식’의 정점을 찍는 주인공이 됩니다. 
그 화려한 정점에서 그의 대 캔버스는 고통 받는 민족에 대한 애정을 담습니다. 독립한 조국, 체코를 위해 <슬라브 서사시>를 헌정하지요. 이로 인해 나치는 체코를 점령한 뒤 제일 먼저 그를 구금합니다. 그의 조국애와 민족주의 성향을 우려한 탓이겠지요? 

이 그림은 <봄,여름,가을,겨울> 중 ‘겨울’입니다. 세로로 긴 화폭에 아라베스크의 문양같이 화려하면서도 절제돼 있는 나뭇가지가 하얗게 눈을 맞고 있습니다. 눈으로 풍성해진 가지들은 흥미로운 이야기 하나씩을 품고 매서운 겨울을 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길고 선이 고운 옷으로 온 몸을 싸매고 있는 여인은 볼이 빨갛습니다. 아무래도 긴 옷자락이 겨울을 다 막지는 못하는 모양입니다. 추위를 녹이는 겨울 여인은 지금 추위를 피해 날아든 새 한 마리 품고 있습니다. 

살며시 감싸 안고 있는 손등에서 포근하고 아름다운 마음이 느껴집니다. 떨고 있는 새에게 불어넣는 입김은 사뿐히 봄의 계절로 넘어갈 듯합니다. 
무하가 그려낸 ‘겨울’은 수줍고도 온화한 색감으로 동화 같은 세상을 담아냅니다. 새를 품은 여인에 빗대어 의인화한 충만하고 창조적인 에너지가 화면 밖까지 묻어나오는 군요. 

종일 맨 몸으로 견디는 나무에 털실 옷이라도 입혀 줘야할 것 같은 겨울입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낙엽이 뒹굴던 자리에 먼 곳의 소식을 전하는 편지 같은 눈이 내려앉을 것입니다. 저마다의 소망을 담은 하늘의 편지가 아파트 피뢰침에, 오래 닦지 않은 유리창에, 길거리에 뒹구는 폐지더미에 배달되겠지요. 

올해 맞는 겨울은 한 자 한 자, 꼼꼼히 읽어 볼 일입니다. 추위에 떨고 있는 새 한 마리가 편지 속에서 울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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