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경호안산시 중앙도서관장
최경호안산시 중앙도서관장

포항시 홍해읍 칠포해안가는 제법 봄기운이 돌았다. 소나무 숲 언저리에는 해국(海菊)이 땅을 비집고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꽃 몽우리를 보니 봄이다. 정호승 시인의 <봄길>을 낭송하며, 들길을 걷는 해파랑길이 좋다. 바다에서는 파도가 햇살을 가득 실고 밀려오다가 하얀 포말이 돼 산산이 부서지고는 했다. 
앞서나갔던 여행자들이 다시 후미 쪽으로 오고 있었다. 하천에서 바다로 흘러가는  물길이 길을 돌려놓은 것이다. 해파랑길 포항 구간은 여행자들을 피곤하게 했다. 안내표식이 잘 돼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간혹 앞서 걷던 여행자가 길을 잘못 들어 뒤에서 느긋하게 걷던 발걸음들에게 앞을 내주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발걸음이 느린 후미들이 앞서 나가며, 인생 역전됐다며, 즐거워했다. 
  삶에서도 그럴 것이다. 남을 밟고 앞서가던 사람이 발목을 다쳐 병원에 입원하고 때로는 먼저 세상을 뜨기도 한다. 해파랑길 트레킹을 통해서 속도보다 방향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도 여행의 즐거움이다.
칠포1리 마을에 도착했다. 마을은 봄볕이 가득했다. 바다로 흘러 들어가는 하천물이 깨끗했다. 밑바닥까지 훤하게 들여다보였다. 모두들 한마디 한다. “물 깨끗하다!” 깨끗한 하천에는 물고기가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더러운 곳에서 많은 물고기를 보는 것 보다 낫다. 
부부가 미역을 말리고 있었다. 그들은 아무 말이 없었지만 말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바다에서 미역을 건져온 아주머니에게 “말려야 미역이 되는 거죠?”라고 말을 걸었다.  “말리지 않아도 이 자체가 미역인데요!” 라고 응수하는 아낙의 말에 여행자들은 웃음보를 터트렸다. 
그네가 해안가를 바라보고 매달려 있었다. 여행자 일행 중 최고령 부부 얼굴에 행복이 가득했다. 남편어른은 빙그레 웃으며, 아내가 앉아있는 그네를 밀어주었다. 열두 번째 해파랑길 트레킹하면서 만난 가장 아름다운 장면이다. 그렇게 칠포리와 오도리를 지나쳤다. 파도가 바위에서 부서지는 곳에서 점심을 펼쳤다. 보쌈과 쭈꾸미가 나왔다. 한쪽에서는 라면을 끓이고 또 한쪽에서는 삼겹살을 구었다. 막걸리와 매실주, 오가피주가 나왔다. 술 한 잔 마시고 반찬 한 점씩 나눠먹는 맛이 좋다.  
몇 잔 마신 몸이 나른해져 왔다. 들길에는 억새가 하늘거리며, 춤을 췄다. 소나무 길은 고즈넉했다. 월포해변에는 학생들이 게임을 하고 있었다. 코끼리 자세로 열 바퀴를 돌고 비틀거리다가 모래언덕에서 넘어지는 친구들의 모습을 보며, 꺄르르 웃는 모습들이 싱그럽다. 내게는 저런 젊음이 없었다. 꿈을 키워야 할 고등학교 3학년이었던 어느날 갑자기 쓰러지신 아버지. 그리고 심장병을 앓는 누이동생과 어린동생들. 나는 먹고 사는 일에 매달렸다. 그리고 내 가정을 꾸렸고 가족 앞에 서 있어야 했다. 나는 오랫동안 아이들이 놀고 있는 그곳에 머물러 있었다. 
  요즘 들어서 지나간 일들을 생각하고는 한다. 나이를 먹으면 지나 간 일들을 많이 떠올리게 된다는데 나 역시 나이를 먹고 있는 것일까.
오늘 도착지인 조사리 해안가는 연신 파도가 바위에게 싸움을 걸고 있었다. 
(3.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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