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우 한지일(71)이 1일 오후 자신이 일하는 서울 중구 호텔더블에이에서 물을 따르고 있다.                                     【사진제공=뉴시스】

 

1970~80년대를 풍미한 미남 스타로 에로영화의 정점을 찍었던 영화배우 한지일(72)이 서울 퇴계로의 한 호텔에서 주차요원으로 근무하고 있어 시선을 끌고 있다.
지난해 4월에 취업해 호텔 스카이라운지에서 웨이터(주임)로 일하던 그는 지난 연말 호텔 측의 결정에 따라 주차장으로 내려온 상태다. 주차관리실 직원이 그만 두겠다는 의사를 밝히자 호텔 측이 한지일씨를 그 자리로 발령한 것이다.
올해 만 72세의 한지일은 주말포함 주 5일, 하루 9시간동안 매서운 한파와 짙은 미세먼지 속에서 몰려드는 차량과 씨름중이다. 추운겨울 외부에서 내부로 근무환경이 바뀌며, 더 혹독해진 일상을 맞았지만 그는 특유의 긍정미소로 취재진의 질문에 응답했다.
“감기요? 이미 걸렸는데 이겨내고 있어요”라고 털털한 모습을 보인 그는 사실 자신보다 주변의 걱정 어린 시선들이 더 고민이다. 
“추운 겨울 외부에서 일하는데다가 차를 돌보는 일이어서 주변에서 웨이터 일하는 것보다 힘들겠다고 걱정한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괜찮습니다. 저는 지금은 배우 한지일이 아니고 호텔리어 한정환(본명)으로 엄연한 이 호텔의 직원이니까요. 이 나이에 안정적인 직장에서 일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 행복한 일이죠”
1990년대 말 IMF사태로 100억원대 재산과 가정까지 잃었던 그는 돌연 미국행을 결심하고 떠났다. 2017년까지 미국에서 생활한 그는 메릴랜드, 오하이오, 버지니아, 일리노이 등 미국 곳곳의 마트에서 박스를 날랐고 식당에서 접시를 닦았다. 나이 탓에 육체노동 업종 취직이 어려울까봐 1960년생이라고 거짓말을 하기도 했다. 
“미국에서 지내면서 27가지 직업을 가져봤어요. 한국에서 제가 소유한 고급 승용차 여러 대를 직접 운전하기도 했지만, 미국에서는 운전기사로도 일했답니다. 운전만큼은 정말 자신 있습니다. 하하하.” 
열정적으로 삶을 개척해 온 한지일은 미국에서 ‘케빈 정’이라는 이름으로 봉사활동을 했다. 폭설에 필라델피아의 한인동포 노인들에게 김을 선물하러 가다가 아찔한 교통사고를 당하기도 했지만, 그는 새 삶을 이뤘다며 흡족해했다.
2년 전 한국으로 돌아온 한지일씨는 일이 고된 요즘 몸보다 마음이 더 힘들다고 말했다. 몇 달 사이 존경하는 선배인 신성일(1937~2018)과 절친한 친구인 하용수(1950~2019)가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지난해 11월에는 성일 형님을 하늘나라로 떠나보냈고 5일에는 절친 하용수를 잃었습니다. 한 번쯤 더 만났어야 했는데 제가 생활인이어서 마음은 굴뚝 같아도 좀처럼 만나러 갈 수 없었죠. 결국 아쉬움만 가득 남게 됐네요. 형님이나 용수는 당연히 안 된다고 하겠지만 조금이라도 일찍 하늘나라로 가 두 사람을 만나고 싶은 마음뿐입니다”

한편 한지일은 김수형(74) 감독의 ‘바람아 구름아’(1973), 이두용(77) 감독의 ‘경찰관’(1979), ‘물도리동’(1979), 임권택(83) 감독의 ‘아제아제 바라아제’(1988) 등 영화와 TV드라마 ‘금남의 집’(1984), ‘형사 25시’(1988) 등 40여 편에 출연했다. 예명 ‘지일’은 배우 김지미(79)의 ‘지’와 신성일의 ‘일’을 땄다. 대종상 신인상·조연상, 아시아 영화제 주연상 등을 거머쥐었다. 
에로영화 ‘젖소 부인 바람났네’(1995) 시리즈 등을 제작해 100억원대 부를 쌓았으나 1997년 IMF 여파로 모두 잃었다. 재기를 모색하던 그는 2005년 SBS TV 드라마 ‘그 여름의 태풍’ 카메오 출연을 끝으로 연예계와 인연을 끊었다.  
연예계를 떠난 지 십수년이 지난 지금, 호텔리어 한지일의 인생 2막은 ‘고희 나이를 잊은 도전’ ‘톱배우의 제2의 인생’ 등으로 각종 미디어가 조명했다. 특히, 신년 벽두인 3일 TV조선 휴먼 다큐멘터리 ‘인생다큐-마이웨이’는 한지일의 웨이터 생활 등 근황을 집중적으로 다뤄 잔잔한 감동을 주기도 했다.
사업의 실패와 가족의 이별, 감옥생활 그리고 우울증까지, 영화배우 한지일의 다사다난했던 인생의 1막은 갔다. 새로운 인생 2막을 연 그는 오늘도 호텔의 발렛파킹맨으로 하루하루를 성실하고 활기차게 임하고 있다.
권민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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