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노라 <br>▲‘그림으로 만나는 서양사’인문학 강사<br>▲‘벗에게 가는 길’인문학 공간 대표<br>
안노라 
▲‘그림으로 만나는 서양사’인문학 강사
▲‘벗에게 가는 길’인문학 공간 대표

 

예술가의 제 일 덕목은 독창성이라고도 하지요. 독창성은 어디서 오는 걸까요? ‘다른 관점’에서? 아니라면 ‘재능’에서? 독창성의 수원지(水源地)는 알 수 없으나 우리는 예술가에게 창조성이나 독창성이 있어야 한다고 주문합니다. 그런 특성을 발현하기 위해 ‘일상을 수락하지 말고 비판적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고도 하지요. 창조적인 그들이 현재에 대한 비판적인 거리를 유지할 때, 나태하고 오만한 문명이나 너절하고 권위적인 관습과 충돌하게 되지요. 오늘은 붓이라는 도끼로 나른하고 구태의연했던 근대를 내리 친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 1862~1918)의 작품 <철학>을 소개합니다. 
별들을 흩뿌린 듯 명멸하는 빛과 그 빛을 감싸는 막막한 우주가 보입니다. 우주 한 가운데 희미한 형상이 있네요. 우주와 인간의 근원에 대한 명상일까요? 아니면 상징주의 화가들이 즐겨 그렸다는 스핑크스일까요? 형상 왼 쪽으로는 나체의 인물들이 뒤엉켜 있습니다. 맨 윗 쪽엔 유년기를 상징하는 어린아이가, 그 아래로는 등을 보이며 고개를 숙인 남자와 여인의 뒷모습이 보입니다. 긴 머리카락을 안쓰러이 감싸며 부둥켜안고 있는 젊은 남녀가 있군요. 맨 아래쪽 벌거벗은 노인은 앙상한 두 손으로 고통에 신음하듯 눈을 가리고 있습니다. 그의 눈과 머리는 무엇을 보았을까요? 그의 두 다리 사이로 고통만큼 어둡고 깊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습니다. 삶이, 존재가 이런 피할 수 없는 번민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걸 말하고 싶은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림 아래쪽 중앙에는 섬뜩하게 정면을 응시하는 여인의 눈이 있습니다. 냉정한 시선의 그녀는 마치 우주 바깥에서 삶의 내부를 들여다보는 것 같습니다. 클림트는 ’철학‘이란 인간의 고통을 들여다보는 눈, 존재를 응시할 수밖에 없는 ’시선의 의지‘라고 말하는 게 아닐까요? 저 회색빛 광활한 우주에 알몸뚱이로 던져진 인간들을 가엾게 여기면서요.
’장식은 더 이상 진보할 수 없다.‘고 한 구스타프 클림트는 1897년, “각 세기마다 고유한 예술을, 예술에는 자유를!” 이라는 슬로건을 내세우고 <빈 분리파>를 만들고 초대 회장이 됩니다. 그는 기존 미술가와의 분리를 통해 독창적이고도 본질적인 그림을 그리고자 했습니다. 그의 자유로운 정신은 곧 거센 비난과 저항에 직면합니다. 위에서 보았듯이 교육부의 의뢰를 받아 제작한 작품 <철학>의 기존 양식과 너무나 다른 발상 때문이었지요. 
세기 말의 혼란과 불안의 징후를 포착한 이 그림은 ’과도하게 관능적이며 선정적이고, 변태성욕자의 무절제‘라고 비난 받습니다. 이후의 작품 <베토벤 프리체>도 격렬한 비평가의 매질에 곤죽이 됩니다. 하지만 만신창이가 된 클림트에게 새로운 시대를 낳는 자궁이자 산파였던 프랑스 파리는 <파리 만국 박람회>에서 <철학>에 금상을 안겨 주며 그의 예술적 진가를 인정합니다. 그리고 근대의 샅바를 틀어쥐고 현대로의 이행을 거부했던 비엔나의 낡은 예술가들에게 미래를 여는 미술가가 탄생했다고 전했습니다. 신성로마제국의 오랜 수도였고 비더마이어 시대의 경찰이었던 오스트리아 빈은 구스타프 클림트로 인해 근대의 껍질을 깨고 현대 모더니즘을 시작합니다. (비엔나 대학 천장화 <철학>,<의학>,<법학>중 <철학>에 관해서만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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