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관순 열사
유관순 열사

해로 3.1운동이 100돌을 맞았다.

무려 1세기라는 세월. 이 같은 유구한 시간이 흘렀음에도 독립운동가와 그들의 후손이 합당한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은 여전히 유효하다. '나라의 빛'(광복)을 되찾아 준 이들. 하지만 '본인의 빛'은 사그라들고만 인생이 다수인 것이다.

아버지 홍재설의 영향을 받아 독립운동에 뜻을 품게 된 홍종욱은 3·1운동의 의인이었다.

홍재설은 고종 황제가 살아있을 당시에는 초급 장군으로서 일제에 대항하는 시위에 나섰다. 을사조약이 체결되며 사퇴한 뒤 본격적인 항일활동에 참여했는데, 친일파 이완용의 집에 불을 질러 전남으로 귀양을 가기도 했다.

홍종욱은 그런 아버지를 보며 독립운동가로 성장했다. 그는 3·1운동 이후 용인헌병대에 체포됐을 때는 '옷이 피걸레가 될 정도'로 두드려 맞기도 했다. 만기 출소 후 '만세주동자'라는 명예로운 낙인이 찍혀 친일파와 일제의 괴롭힘에 시달려 사실상 경제활동이 불가했다고 전해진다. 1968년 세상을 떠났으며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됐다.

손자인 민표 씨는 "내가 중학교 1학년 때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어린 나이엔 할아버지가 왜 폐인으로 사나, 경제활동을 안 하시나 싶었다. 독립운동을 한 지도 몰랐다""나라에서는 친일파가 득세했고 독립운동하는 사람을 견제하는 마당에 어렵게 살 수 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또 다른 독립운동가 김정숙. 그는 19161월 평남 용강에서 태어났다. 중국 중산대학을 다니던 1937년 언니인 김효숙과 학생전시복무단을 결성해 항일활동을 시작했다.

1938년에는 한국독립당에 가입했으며, 이후 한국혁명여성동맹을 결성하고 한국광복군 창설에 참여하는 등 활발한 독립운동을 펼쳤다.

1942~1944년에는 임시정부 교통부 및 법무부 총무과장 등을 역임하며 광복을 위해 헌신했다.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훈했고, 20127월 숙환으로 별세했다.

김정숙은 슬하에 아들과 딸을 뒀다. 광복 이후 19506·25사변이 터지면서 어린 아이들을 돌보기 어려웠다는 후문이다.

특히 정부에서 연금이 제대로 지원되지 않아 생활고를 겪기도했다.

김정숙은 2002년 장세윤 성균관대 연구교수와의 면담을 통해 "1963년까지만 해도 독립유공자라는 개념이 없었다. 국립묘지도 지금에야 국립묘지일뿐, 그때는 6·25당시 희생된 군인들을 위한 묘지였다"고 밝히기도 했다.

3·1운동의 상징과도 같은 유관순 열사의 후손도 예외가 아니다.

광복회 측에 따르면 유관순의 조카인 70대 여성 A씨는 월급 80~90만원을 받고 청소 일을 하면서도 선대에 누가 될까 처지와 신상을 밝히지 않고 있다.

김상덕 반민특위 위원장의 아들 정육씨도 마찬가지였다. 김상덕이 6·25사변 때 납북되자 공산당으로 몰려 직장을 구할 수 없었다. 그는 우유나 신문을 배달하며 살아야 했다.

정육씨는 뒤늦게 결혼해 아들과 딸을 얻었다. 그런데 그 아들이 40세에 췌장암으로 세상을 떠났고, 아들이 떠나기 1년 전 정육씨는 암 수술을 크게 받아 거동을 못하는 상황이다.

한국인 최초 여자 비행사이자 독립운동가 권기옥의 후손인 광복회 권현 이사는 이렇게 말한다.

"유명한 분들은 대접을 받기도 하지만, 나머지 분들의 후손은 대다수가 어렵게 산다. 그럼에도 선대의 명예를 지켜드리고자 어디 가서 배고프다, 힘들다 말을 안 한다. 이렇게 3·1절에나 언론사들의 전화나 방문이 있다. 어차피 내일 하루가 지나면 다 잊힐 것이다. 그런 것이 후손들에게 더 상처가 된다. 한 번 이야기하고 지나가지 않았으면 한다."

이인영 전승문화연구원 이사장은 "독립운동가들의 생가나 묘지, 유족을 심층적으로 찾아 표석을 해놓는 사업이 없다. 기억하는 사업이 소홀한 것"이라며 "3·1운동 당시 보안법을 위반한 사람들을 조사하면 독립운동가들을 더 많이 발굴할 수 있다. 이런 부분에 한해서는 개인신상보호법을 우선하기 보다 정보공개를 해줄 필요가 있다"고 제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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