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경호안산시 중앙도서관장
최경호
안산시청 관광과장

양양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가볍다. 여행은 즐겁고 마음 설레게 한다. 한국여행작가협회 이종원 회장은 “여행은 다르게 생각하는, 큰 눈을 뜨게 해주는 최고의 스승이다”고 말했다. 그랬다. 나에게 여행은 즐겁고 마음 설레게 할 뿐 아니라 몰랐던 것을 알게 해주었고 아이디어를 떠오르게 했다.

이번 트레킹은 42코스인 죽도정에서 시작해 45코스인 대포항까지 걷는 여행이다. 양양에서 속초로 공간 이동을 하는 코스다. 죽도정 앞 바다는 겨울 채비를 하고 있었지만 아직도 청춘 냄새를 느낄 수 있었다.

민태원은 <청춘예찬>에서 “이상! 빛나는 귀중한 이상, 이것은 청춘이 누리는 바 특권이다“ 고 노래했다. 그런데 현실은 각종 스펙을 만들기 위해 청춘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 안타까운 일이다. 정상적이지 못한 현실에서 흙수저는 금수저에게 경쟁 대상이 아니다. 국정농단의 비선 실세인 최순실의 딸 정유라는 지난 2014년 SNS에 “능력 없으면 니네 부모를 원망해! 있는 우리 부모 가지고 감놔라 배놔라 하지 말고”라고 말했다고 한다. 씁쓸하다.

지난 9월, 내가 지리산둘레길 트레킹을 하고 오니 아들 녀석은 배낭을 꾸리고 있었다. 친구들과 양양으로 서핑을 즐기러 간다고 했다. 양양은 언제부터인가 청춘들에게 인기 있는 곳이 돼 있었다. 돌이켜보니 나에게 청춘은 없었던 것 같다. 갑작스럽게 쓰러지신 아버지로 인해 우리 집은 풍전등화였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기 전에 이불 한 채 짊어지고 서울 답십리 주택가 허름한 공장에서 사회 첫발을 내딛었고 내 삶을 비관했던 시간이 청춘이었다. 돌이켜보면 나에게 청춘은 방황이었다.

북분해변과 잔교해변을 지나니 38휴게소가 보였다. 1953년 한국전쟁이 휴전되기 전에 이곳은 한반도 북쪽이었다. 하조대 안내표식판이 보였다. 11월 바닷가에서는 음식점을 지나치면 문을 연 곳이 많지 않아 자칫 굶을 수가 있다. 36년 동안 음식점을 했다는 여 사장님은 문을 열고 들어서는 여행자들을 점쟁이같이 알아 봤다. 김장을 하던 중이라 먹음직스러운 겉절이가 나왔다. 양양송이막걸리 한 잔에 제육복음과 알이 통통한 도루묵을 오물거렸다.

거하게 먹은 점심 힘으로 길을 나섰다. 43코스 종착지인 수산항까지는 9.4km. 동호해변과 수산해변을 걸으면서 나희덕 시인의 <11월>을 외웠다. 예순 두 번째 외우는 시가 자꾸 머릿속에서 맴돌다가 잊혀졌다. 길가에 풀꽃 한 송이가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시인이 노래했듯이 저 꽃도 다가오고 있는 겨울을 이길만한 눈동자를 가지고 있는 듯 했다.

서산에 해가 뉘엿거리고 있었다. 44코스는 수산항부터 오산해변까지다. 해안가에 서핑 조각상만큼이나 곳곳에 청춘들이 초겨울 바다를 즐기고 있었다. “춥지 않나요?” 슈트에서 물을 뚝뚝 떨어뜨린 채 해안으로 나온 젊은 친구는 웃으면서 “추워요” 하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낙산해변에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했지만 불빛이 점차 해안을 밝게 만들어 가고 있었다. 우리는 내일 아침에 낙산사를 둘러 볼 수 있는 모텔을 잡았다. 주말인데도 관광객들이 없어서 호텔과 펜션은 적막이 감돌았다. (여행 첫째 날)

밖은 아직도 어두웠다. 날이 밝기 전이 가장 어둡다고 했던가! 나는 오랫동안 ‘새벽’을 닉네임으로 사용해 왔다. 새벽이라는 말만 들어도 가슴이 뛰었던 시간이 있었다.

그런데 그 시간이 아득한 옛날 같다. 낙산사로 오르는 정문은 고요했다. 나는 침잠했다. 수평선 너머로 해가 솟을 시간인데도 서둘러 걷지 않았다. 4대 천왕문을 지나서 관세음보살님을 봉안한 낙산사의 금당인 원통보전을 기웃거리다가 꿈이 이루어지는 길을 걸었다. 해수관음상이 저 멀리 수평선을 바라보고 있었다. 후문으로 내려가는 곳에는 의상대와 홍련암이 있었다. 구름을 젖히고 해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홍련암 앞에 서서 바라보는 의상대가 삼삼하다.

오늘은 대포항까지 걷기로 했다. 낙산사에서 4.9km 떨어져 있는 곳을 일행과 떨어져서 걸었다. 외우고 있는 시를 하나하나 꺼냈다. 어제 외운 <11월>까지 합하니 62개였다. 이제는 마라톤 한 번 완주하는 것 보다 시 하나 외우는 것이 버겁다. 일행에게 많이 뒤쳐졌다 싶으면 조깅하듯 달렸다. 어느새 등줄기에서 땀이 흘러 내렸다.

물치천교와 쌍천교를 달려서 도착한 곳은 속초 해맞이공원이었다. 아! 드디어 속초에 도착했다. 속초는 양양과 다른 느낌이었다. 대포항 한켠에서 도루묵을 손질하는 아주머니가 연탄불에 구운 도루묵을 먹어보라고 건넸다. 11월 양양과 속초는 도루묵 풍년이다.

11. 26. -27. 속초 대포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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