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경 너머의 고려사람

1863, 연해주 노보고르드스키 국경감시소 담당관은 군() 총독에게 짧은 보고를 한다.

<한인 13가구가 빈곤과 굶주림 및 착취를 피하여 비밀리에 남 우수리스크 포시예트 지역의 치진헤에서 농사를 짓고 있고, 이곳에 정착하여 살게 허락해줄 것을 요청한다>

이 보고서는 후에 러시아 극동 지역의 한인 거주 사실을 담은 최초의 공식문서가 된다. 당시는 조선 말기, 같은 해 12살 왕(고종)이 등극한다. 몇 해 뒤 대홍수가 북부 지방을 덮치고 굶주린 사람들은 세금수탈이 없는 비옥한 땅을 찾아 어디든 가야 했다. 국경은 문제가 될 수 없었다.

연해주 지역에는 어느새 러시아인보다 더 많은 조선인들이 모여 살게 됐다.(1890년 말 러시아의 인구조사에 의하면, 조선말을 하는 사람이 26,005명이라 한다.) 이들은 공동체를 이루고 벼를 경작하며 자신들을 고려사람이라 불렀다. 러시아어로는 카레이스키(корейский). 번역하면 코리아사람. 우리는 이들과 그 자손을 고려인이라 부른다.

 

반복되는 삶, 잊혀진 이야기

150년 후, 고려인들은 다시 한국 땅을 밟는다. 강제 이주와 소비에트 연방 붕괴 등 이들을 둘러싼 역사는 삶의 터전을 자꾸만 휩쓸고 가고, 이주의 역사는 끝나지 않는다. 이들의 증조모는 조선에서, 조부모는 극동 연해주에서, 부모는 중앙아시아에서 태어났다. 도돌이표처럼 그 자신은 부모가 조선 땅이라 부르던 한국에 온다. 종일 낯선 땅을 개간하던 고려인 1세의 역사는 변두리 공장 담장 안에서 반복된다.

이들은 일터에서 질문 받는다. “어디 사람이냐.” 우즈베키스탄 () 국적을 가졌으나, 러시아 말을 쓰고, 조선의 문화를 지녔다. 답하지 못하고 서툰 한국말로 되묻는다.

나는 러시아 사람인지, 우즈베키스탄 사람인지, 한국인인지.”

그의 혼란은 이곳에선중요하지 않다. 국내 8만 명이 있다고 추정되는 고려인들을 우리는 본 적 없고 만난 적 없다. 체류자격 등 비자와 각종 정책은 고려인들을 공단 옆 가난한 동네에 몰아넣고, 저렴한 노동력으로만 존재하게 한다.

부모를 따라 한국에 온 고려인 4세는 역사 수업시간에 물었다고 한다.

선생님, 안중근 의사도 고려인이라는 사실 아세요?”

(안중근 의사는 1907년 연해주로 건너가 의병에 가담했다. 고려인 1세대라고 부를 만하다. 당시 연해주 일대에 항일의병으로 참가한 고려인 수는 10만 명에 달했다고 한다.)

그럴 수도 있겠구나, 그저 그 한마디. 교사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외국에서 왔기에 말이 어눌하고 가정형편이 좋지 않은 학생이 하는 소리일 뿐이다. 아이가 할머니에게 듣던 수많은 고려인 선조들의 이야기는 이곳에머물지 못한다.

 

어디 사람, 존재하는 사람

이야기는 머물지 못해도 사라지진 않는다.‘내가 어디 사람인지묻는 이들은, 그러나 1세대 고려인을 기억한다. 항일항쟁에 참여했다는 자부심, 강제이주의 슬픔, 개척의 자부심, 변주를 거듭해오며 지켜낸 문화와 공동체이 모든 이야기들은 가슴에 켜켜이 쌓여 자신들의 역사와 정체성, 그러니까 고려인을 만들어 왔다.

수업시간에 손을 들어 안중근 의사를 언급한 고려인 4세는 고려인이 여기 존재함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이들의 지나온 역사는 이야기되지 않고, 이들의 현재는 논해지지 않는다. 우리의 무심함과 이들의 존재가 연재를 시작한 이유이다. 4세대에 걸친 고려인의 역사와 현재 삶을 여덟 차례의 이야기에 담고자 한다.

연재집필 = 희정 기록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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