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할머니한테 들은 이야기인데라며 입을 뗀다.

이름이 예브게니라 했다. 인터뷰 시작 전, 내 쪽에서 물었다. “오늘 무엇을 물을 거라 예상하나요?” 예브게니의 성은 김씨라고 했다. 김예브게니가 답한다. “할머니 할아버지 이야기요예전에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고 했다. 어릴 때 한 것이라 매체도, 내용도 생각나지 않는다고 했지만 알고 있었다. 사람들이 자신에게 보이는 관심은 할머니(할아버지) 이야기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17, 고려인 3세다. 초등학교 때 한국에 와서 지금은 안산에서 고등학교를 다니고 있다. 러시아 국경을 넘은 첫 세대의 이주가 1860년대로 추정되니 이들의 후손이 한국에 돌아온 것은 150년만이다. 3-4세대를 거쳤다.

부모를 따라 한국에 온 고려인 청소년의 경우, 국사 수업시간에 고려인을 배우게 된다. 재외동포를 설명하는 가운데 짤막하게 소개될 뿐이지만. 조선 말기와 일제강점기 국경을 넘어 러시아 연해주 등지로 이동한 이들과 그 후손을 고려인이라 한다.

교사들은 묻는다. 러시아나 우즈베키스탄 등에서 온 학생을 향해서다.

몇 세니?”

“4(3)답을 하나 대화는 이어지지 않는다. 간혹 할아버지한테 들은 이야기가 있니?” 정도의 물음이 덧붙기도 한다. 더 오갈 대화는 없다. 상호간에 질문이 오고 가려면 작을지라도 관심이 필요하다. 정보가 필요하다. 호기심일지라도 관심은 나와 관계된대상에게 만들어진다. 한국 사회에서 고려인은 우리관계된존재일까.

그 관계라는 것을 만들어 볼까 하여 물었다. 교실에서의 질문처럼 뻔했다.

조상들이 왜 러시아로 갔나요?”

인터뷰에 동석한 어떤 이가 지적한다. “조상, 선조 같은 단어는 피하는 게 좋아요상대가 알아듣기 힘든 단어라는 소리다. 한국말이 서툴다. 고려인들은 주로 러시아 말을 쓴다. 고쳐 다시 묻는다.

할머니의 어머니는 왜 러시아로 갔나요?”

왜 갔나요?” 뻔한 질문을 하다

러시아 애칭으로는 제냐, 김예브게니가 말한다.

할머니 엄마가 조선에서 독립운동을 했어요. 일본군이 마을에 들어왔을 때 같이 싸웠어요. 싸움에서 졌고 러시아로 도망쳤어요. 호수? 강 같은 것이 있어서, 그 길을 건너 러시아까지 걸어갔어요

아마 두만강을 가리키는 것일 게다. 많은 고려인들이 두만강을 넘었다. 첫 세대는 생존이 이유였다. 이주 기록이 최초로 문헌에 담긴 1863년 이전에도 국경을 넘는 일은 빈번했다. 봄에 몰래 연해주로 가 주인 없는 땅에 농사를 짓고 농한기에 돌아오곤 했다. 국사교과서를 펴면 수탈과 세도정치가 나오는 그 시절이었다. 굶어죽지 않기 위해 국경을 넘었다.

대흉년이 들자 마을 전체가 이주를 시도하기까지 한다. 수만 명으로 불어난 러시아땅 조선인들은 지신허(남우스리스크 포시예트)에 정착한다. 고종 폐위 이후 항일의병이 대거 연해주로 이동하는 등 일본의 압제를 피해 국경을 넘는 이들도 늘어간다. 예브게니가 들려준 일본군과 싸운 할머니 이야기가 여기 속하겠다.

할머니의 엄마는 블라디보스토크까지 걸어가서 살게 됐고. 다시 하바롭스크까지 갔어요. 거기에 고려인 사람들 많이 계셨어요

기록에 따르면, 초기 한인 마을인 개척리(블라디보스토크 포그라니치나야)는 수십 리에 걸쳐 집들이 늘어섰다고 한다. 초가집과 조선어 간판은 흔했다. 1890년대 말 시행된 러시아 제국의 인구조사는 조선말 하는 사람을 26천명이라 밝혔다. 1900년대 초에 이미 연해주 한인(고려인) 마을만 32개였다.

규모 있는 마을들은 저마다 자치공간을 형성하려 애썼고, 색중청과 같은 한인 자치기구를 조직해 마을 내에서 자율적으로 임원을 뽑아 분쟁과 시비를 가리는 등 치안활동과 관혼상제 등을 챙겼다.

연해주는 고려인들에게 생존 문제에서만 희망의 땅이 아니었다. 당시 10월 혁명과 내전으로 러시아는 격동의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러시아로 이주한 이들은 문화를 지키면서도 세계 흐름과 함께 움직였다. 볼셰비키과 연대해 러시아 내전(적백내전)에 참여하기도, 권리 향상에 영향 받아 각지에서 민족인민위원회 한인(고려인)분과 설립을 꾀하기도 한다.

조선에서 만세시위가 있던 해(1919)에 연해주에서도 대규모 시위가 열린다. 그 다음해 독립문을 본딴 기념비가 신한촌에 세워진다. 1908<해조신문>을 시작으로 한글신문이 발행되고, 1917년 이전까지 45개 정도였던 한인 초급학교는 20년 뒤에는 287개로 증가해, 학생만 2만여 명이라 했다. 이를 고려할 때 당시 국내(조선)보다 문맹률이 낮으리라 추측되는, 연해주는 그런 땅이었다.

연재집필 = 희정 기록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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