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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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노라 <br>▲‘그림으로 만나는 서양사’인문학 강사<br>▲‘벗에게 가는 길’인문학 공간 대표<br>
안노라 
▲‘그림으로 만나는 서양사’인문학 강사
▲‘벗에게 가는 길’인문학 공간 대표

 

도시는 상처가 숨기에 적당한 곳입니다. 근대 이전의 삶에서 상처란 ‘아픔’에 끼얹어진 ‘수치’였습니다. 동네나 마을과 같은 촌락의 단위는 인격적 관계를 기반으로 하는 공동체이기에 개인 삶의 내력이 진술서처럼 보관되었지요. 들추고 싶지 않은, 기억하고 싶은 않은 어제가 미래로 걸어가는 발뒤꿈치에 매달려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과거로부터 도망갈 곳이 필요했는지 모릅니다. 총명하고 부지런한 인간들이 신으로부터, 전통으로부터, 남루한 신분으로부터 벗어나 근대의 도시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하여 19세기 근대를 여는 도시, 파리는 도망자의 것이었고 이주민의 것이었고 디아스포라의 것이었지요.

구스타프 카유보트(Gustave Caillebotte 1848~1894)는 도시를, 아니 정확하게 말한다면 파리 도시민의 일상을 그렸습니다. 그는 인상주의 화가들을 후원하는 미술품 수집가이자 화가였습니다. 인상주의 화가들이 빛에 따른 색과 형태의 변화에 집중할 때, 그는 오스만 양식이라 불리던 세련된 건축물과, 회색 공기에 숨겨진 과학과 속도의 구조물, 새로운 시대를 열고자 했던 강인한 남자들의 걸음과 뒷모습을 캔버스에 담았습니다. 위 그림은 <비오는 날 파리 거리>라는 작품입니다.

화면은 초록색 가로등으로 인해 양분되어 있습니다. 오른 쪽 전경에는 우산을 쓰고 어딘가를 바라보는 남녀의 모습이 있습니다. 두 사람의 시선은 앞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작은 소란이 있었던 걸까요? 사선으로 빗긴 그들의 시선은 화폭 너머까지 캔버스를 확장시킵니다. 실크 햍을 쓴 정장차림의 남자와 치맛자락을 잡은 여인의 우아한 자세가 여유로워 보이는군요. 중앙에는 고개를 숙이고 사색하는 남자가 걸어갑니다. 친밀한 대화를 나누듯 나란히 걷는 두 남자도 보입니다. 카유보트는 미처 우산을 준비하지 못한 사람들이 걸음을 재촉하는 모습도 놓치지 않습니다. 화면 저 뒤편, 건물과 도로의 경계선은 화면을 수평으로 나누어 주어 후경의 사람들을 시야 속으로 끌어안습니다.

그런데 화면 오른쪽 앞을 볼까요? 잘린 남자의 뒷모습이 있습니다. 왠지 어색하지요? 마치 거리를 지나가다 무심히 셔터를 누른 스냅사진 같지 않으신가요? 맞아요. 까유보트는 찰나의 순간과 우연한 채집을 기본으로 하는 사진술에 매료되었습니다. 전경의 남녀는 우산의 활대와 주름까지 섬세히,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후경은 아웃 포커싱처럼 형태만을 표현한 것으로도 그러한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1839년 사진기의 발명은 회화가 자신의 정체성을 고민하게 된 출발점이고 이후 두 분야는 서로 심각한 영향을 주고받게 되지요. 드가가 사진을 찍어 캔버스 안의 다양한 구도를 실험했듯 말입니다.

19세기, 과학과 이성의 힘이 근대를 상징하는 기차에 실려 파리의 생 라자르 역에 도착했을 때, 기존의 낡은 속도로는 전통과 혁신이 공존하는 시대의 변화를 담을 수 없다는 위기도 함께 하차했습니다. 보들레르가 파편적이고 우연함이 스쳐 지나가는 아름다운 도시의 몰골을 <악의 꽃>으로 명명했듯, 카유보트는 사진과 회화의 거리를 거닐며 내면의 도망자들이 익명의 도시에 스며드는 모습을 기록하였습니다. <비오는 날 파리거리>는 기차가 나아가는 방향의 끝에 개인이 있다는 것을 감지한 예민한 예술가의 감수성이 낳은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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