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인지원센터 너머 태권도 수업
고려인지원센터 너머 태권도 수업

“부모는 뿌리 내리게 하는 사람이에요”
이주한 까닭을 물으니 이리 답한다. 우즈베키스탄에서 뿌리내릴 수 없기에 2010년 자녀들을 데리고 한국에 왔다고 했다.
천 따찌야나 씨의 이야기다. 당시 첫째가 11살, 둘째는 8살이었다. 친구들과 떨어져 말도 통하지 않는 낯선 곳에 가야 했다. 당연히 가기 싫어하는 아이들을 붙잡고 따찌야나 씨는 말했다고 한다.
“우즈베키스탄 우리 고향 아니야. 이제 우즈베키스탄은 우즈베키스탄 사람들 고향이야”
그래서 우즈베키스탄을 떠나왔다고 했다. 고향이 될 수 없어서.
좋은 일자리를 얻을 수 없어요
고향은 무엇을 의미하냐고 묻고 싶었지만, 우선 따찌야나 씨의 고향은 어디냐고 물었다. 그녀는 예전이라면 ‘소련’이라 답했을 거라 한다. 그러나 소련은 사라졌다. 91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은 해체된다.
1980년대부터 소련 내 민족주의 운동이 확산되고 중앙아시아 공화국들의 독립국가 건설 요구가 커진다.
그에 따라 공화국은 자민족 언어를 공식 언어로 채택하기 시작한다. 독립 후인 2004년에는 우즈베키스탄의 모든 공문서가 우즈베크어로만 작성된다. 러시아어를 사용해온 고려인들에겐 새로운 언어 장벽이었다.
학교 수업도 우즈베크어로 진행됐다. 이때 많은 고려인 교사들이 교편을 내려놓아야 했다. 다른 직업들도 마찬가지다.
“우즈베키스탄 사람 아니면 좋은 일자리를 얻을 수 없어요”
한국에 온 이유를 물으면 우즈베키스탄 출신 고려인들은 이 대답을 했다. 강제이주 세대의 혹독한 적응을 발판삼아 다음 세대는 고등교육을 받고 전문직업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런데 수십 년에 걸쳐 이룬 사회적 지위가 또다시 흔들렸다. 민족 부흥정책은 소수민족에 대한 배제로 이어졌다.
그런 가운데 정국은 불안했고, 물가는 요동쳤다. 우즈베키스탄을 비롯한 중앙아시아 고려인들은 안정된 삶을 찾아 각지로 흩어진다. 그러다 한국에 온다.
자녀의 인생을 생각해 한국에 오다
국내 한국인과 고려인들이 서로의 존재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 88년 서울올림픽이었다. 각국 사람들이 서울에 온 그때, 소련 선수단 명찰을 달고 고려인 선수들도 올림픽에 참가한다.
고려인들도 변화된 남한 모습을 생중계를 통해 접한다. 이후 소련의 개방정책 흐름을 타고 대우그룹 등 기업과 한국 선교사들이 러시아 영토로 진출한다.
점차 고려인들도 한국을 찾게 되고, 2007년 방문취업(H-2) 비자가 구소련 지역 동포들에게 발급되자 국내 고려인 수는 급증한다. 출입국 통계에 따르면, 2019년 현재 국내 거주 중인 고려인은 8만 명 이상이라 추정된다.
두 아이의 아빠인 박 알렉산드라 씨는 고려인들이 단지 일자리 때문에 한국에 오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우즈베키스탄에서는 아이들 학교 가는 것도 차로 데려다 주지 않으면 위험합니다. 여기(한국)는 안전하게 가르칠 수 있어서 좋습니다”
통학길마저 안심할 수 없는 상황이라 했다. 그래서 5년 전 가족들과 한국으로 왔다. 2014년이 첫 방문은 아니었다.
14년 전인 2000년, 24살 나이에 한국으로 일하러 왔다. 방문취업비자(H-2)가 발급되지 않던 시절이었다. 그는 우즈베키스탄 소속으로 왔다.
의정부 남양주에 회사가 있었는데,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당시 이주노동자들에게 제공되는 일이란 것이 빤했다. 일은 힘들고 말은 통하지 않았다. 같이 일하는 한국인들도 고려인이 누구인지 알 리 없었다. 4개월만에 우즈베키스탄으로 돌아간다.
그 후 가족이 생겼다. 우즈베키스탄 상황은 나아지지 않고, 일자리 구하기는 더 힘들어졌다. 박 알렉산드라 씨는 다시 한국으로 왔다. 세월이 지났으니 노동환경이나 작업장 사정이 나아졌냐고 물었다. 별로 그렇지 않은 듯 했다. 그래도 오래 머문다. 자녀의 인생을 생각해야 하는 나이가 되었다. 
                                                             희정 기록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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