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안산대 지역협력지원센터장 산업경영학과 교수 박형근
신안산대 지역협력지원센터장 산업경영학과 교수 박형근

우리 인생에서 일어나는 많은 상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극복해 가는 방법으로 다음 몇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 머리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사랑했던 그 무엇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은 너무나 고통스럽다.
인정하지 않으려고 “절대 그럴 리가 없어”, “이건 아니야”, “이건 꿈이야”라며 절규한다.
예상치 못한 상실을 당했을 때 사람들은 그 상실을 부인하고 싶어 한다.
이렇게 현실을 회피하면 해결방법이 없다.
어차피 피할 수 없는 고통이라면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어야 극복할 수 있는 문이 열린다.
인정하긴 싫지만 어쩔 수 없는 현실을 인정하고 받아드려야 한다. 물론 떠나지 않기를 바라지만, 떠나면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떠났어!”, “나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다!”라고 속으로만 생각하지 말고 소리치는 것이다.
아무도 없는 나만의 골방이나 차를 몰고 인적이 드문 곳에 가서 차 속에서 큰소리로 소리친다.
처음에는 전보다 더 큰 슬픔이 밀려와 가슴이 조여 오며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눈물이 흐를 것이다.
하지만 계속해서 소리치다 보면 점차 마음의 안정을 찾으며 인정하고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둘째, 가슴으로 받아들인다.
머리로 받아들였다고 모든 것이 다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다음 단계는 가슴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머리로 받아들이는 것과 가슴으로 받아들이는 것에는 차이가 있다.
“사랑하는 사람이 떠났다”고 인정하면서도 전혀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남자, 남의 일을 말 하듯 “어머니가 돌아가셨어”라고 입으로 내뱉는 아들. 이런 모습은 머리로는 상실의 현실을 인정하지만 가슴으로는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머리로 받아들일 때는 ‘소리’가 필요했지만, 가슴으로 받아들일 때는 ‘침묵’이 필요하다.
조용한 곳에 가서 가슴으로 느껴보는 것이다. 슬픔, 분노, 고통, 후회, 절망, 두려움 등을 가슴으로 아낌없이 느껴보는 것이다.
셋째, 숨어 있는 모든 힘을 동원한다.
지금까지 머리와 가슴으로 상실 그 자체를 온전히 받아들였다. 그러면 이제는 그 상실을 이겨내기 위해서 우리 자신도 몰랐던 힘을 불러내어 본다.
“나는 괜찮아!”, “새 인생이 시작되는 거야”라는 식의 꿈같은 말은 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단번에 상실의 아픔을 완전히 극복했다고 느끼게 하는 자기암시는 좋지 않다.
이것은 일종의 가식이기 때문이다.
대신에 다음 문장을 아침저녁으로 열 번씩 외워본다.
“나는 견디어 낼 힘이 있어.”
이런 자기암시는 다른 일을 하는 중간에도 가능하다.
단지 형식적으로 자기암시를 하지 말고 정성을 다해야 한다.
오 헨리의 단편소설 『마지막 잎새』에 나오는 가슴앓이 소녀가 마지막 잎새와 함께 자기도 죽는다고 생각한 것은 부정적인 자기암시였고, 늙은 화가가 그린 마지막 잎새를 보고 용기를 되찾은 것은 긍정적 자기암시였다.
이제 상실감으로 고민하는 우리에게 늙은 화가의 마지막 입새가 필요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친구로부터 위로를 받는다.
고맙게도 상실감으로 슬픔을 견디어 내고 있는 우리에게는 친구가 소식을 듣고 달려와 준다.
그 친구도 사람인지라 우리의 슬픔을 다루는 데 익숙하지 않다. 그러나 친구에게 몇 가지 방법을 통해서 위로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친구가 우리의 슬픈 사연을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된다.
누군가 나의 아픔을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큰 힘이 될 수 있다.
친구에게 슬픔과 고통을 털어놓는 것이다.
그런 다음에는 상실감을 극복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조치를 친구와 함께 하면서 위로를 받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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