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견직근로자 모집 [고려인 너머]
파견직근로자 모집 [고려인 너머]

고려인 청소년들과 인터뷰를 하며 한국에 오기 전 이야기를 물어본다.
“우즈베키스탄에서 부모님은 무슨 일을 하셨나요?”
기술자, 교사. 의사. 그런 직업들을 말해준다. 다음 질문을 한다.
“한국에서는 무슨 일을 하세요?”
대답이 단순해진다.“회사요”
무슨 회사요? 잘 모르겠어요. 부모들은 자녀에게 무슨 일을 하는지 예전처럼 말해주지 않는다. 대답을 듣지 못해도 추측은 가능하다. 국내 고려인의 70% 가까이가 단순노무직에 종사한다는 조사결과가 있다.(<국내 거주 고려인 동포 실태 조사> 2014. 재외동포재단)
보통 공단 내 제조업체나 건설현장에서 일한다. 무슨 일을 하세요? 부모 세대에게 물으면 서툰 한국말로 답해준다.
“핸드폰 부품 만들어요”
공단 인근 동네의 저녁 풍경은 승합차에서 삼삼오오 내리는 이들로 만들어진다. 승합차가 퇴근버스를 대신하는 게다. 안산 땟골마을(선부동)도 마찬가지. 봉고차에서 고려인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내려 무리지어 걸어간다. 여성들이 많다.
공단 내 부품업체에서 고려인 여성들이 주로 하는 작업은 도금, 염색, 납땜 등이다. 열을 가하고 흄(가스)이 나오는 작업. 위험하고 힘든 일은 이들에게 간다.
최저임금 일밖에 없다
2007년 구소련 지역 동포들에게 방문취업비자(H-2)가 발급된 후, 국내 고려인 수는 꾸준히 증가해왔다. 출입국관리소 통계에 따르면 2014년 4만 명이라 추정되던 수가 5년 사이 2배 넘게 늘었다. 안산 땟골마을(선부동), 광주 고려인마을(월곡동) 등 공단 인근 저렴한 주택가에 자신들만의 거주지도 형성한다.
장기체류가 가능한 재외동포 비자(F-2)도 있지만, 접근이 어려워 중앙아시아 고려인은 50% 이상이 방문취업(H-2) 신분이다. 재외동포비자는 발급기준이 대학졸업자, 법인기업대표, 기능사 자격증 소지자 등으로 한정되기에 취득이 어렵다.
재외동포비자를 받았다고 마냥 좋아할 수도 없다. 앞서 많은 고려인들이 단순노무직에 종사하고 있다고 했다. 그런데 재외동포비자는 국내 취업질서 유지를 이유로 들며 단순노무직취업을 금하고 있다. 그러니 몰래 일한다. 그것 밖에 일자리가 없다.
학력도 기술도 러시아에서 익힌 것은 인정해주지 않는다. 말도 통하지 않는다. 고려인들끼리는 자조 섞인 농담을 한다. 공장에 가면 ‘뒤에는 교수, 앞에는 박사, 옆에는 음악가’가 있다고. 떠나온 나라에서 직업이 무엇이었든 지금은 최저임금 라인을 탄다. 임금이 체불되어도 산재를 당해도 신고하지 못한다. 악순환이다.
러시아에서처럼 일하면 안돼요
특히 문제는 언어. 한국어를 배울 새도 없이 취업부터 한다. 강제이주 세대 부모들이 짐 보따리 한두 개를 이고 중앙아시아로 간 것처럼, 한국에 온 이들도 번번한 세간 하나 가져오지 못했다. 낯선 곳에선 모든 것이 비용이다. 우선 돈부터 번다. 언어를 배울 기회는 멀어지고, 파견-일용직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직장생활은 어떠냐고 물으니, 한국 거주 10년차인 따냐가 말한다.
 “한국인 빼고 다 똑같아요”
무슨 말일까. 직장 동료 대부분이 다양한 국적을 가진 이주노동자라 했다. (국내) 한국인은 얼마 없다.
“한국인 빼고는 다 무시당하는 거 똑같아요”
같이 일하는 친구 이야기를 한다. 한국에 온 지 2년 밖에 되지 않아 언어가 미숙하다. 그래서 그 친구는 지금 공장에서 가장 힘든 일을 한다고 했다.
“힘든 거 시켜요. 자기들 하기 싫은 거. 여자인데 남자 일 하고 있어요”
한국인과 이주노동자가 서로 같은 것이 있다고 했다. ‘한국식’으로 일해야 한다.
소련 집단농장에서 목표를 몇 배나 초과하는 수확량을 내며 놀라운 노동능력을 보여주던 고려인들은 한국에서 새로운 도전을 맞는다.
한국에 오기 전까지 이런 속도로 일해본 적 없다. 그렇게 일했는데 월급날마다 임금 계산이 안 맞았다고 했다. 잔업수당 등이 늘 적게 계산되어 나왔다

기록노동자 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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