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노라&nbsp;<br>▲‘그림으로 만나는 서양사’인문학 강사<br>▲‘벗에게 가는 길’인문학 공간 대표<br>
안노라 ▲‘그림으로 만나는 서양사’인문학 강사 ▲‘벗에게 가는 길’인문학 공간 대표
[달마도] 그림출처 = 네이버
[달마도] 그림출처 = 네이버

방탄소년단의 인기가 가히 세계적입니다. 얼마 전 뉴스에서 K팝이 글로벌 시장에서 인기를 끌며 한류흑자를 견인하는 중심에 방탄소년단이 있다고 보도했습니다. 중국의 2016년 한류 제한령이 본격화 된 이후 처음으로 흑자의 규모가 한한령 이전 수준으로 회복되었다고 하네요. 자랑스런 젊은이들입니다.

오늘은 BTS가 몰아치고 있는 한류태풍의 원조를 소개합니다. 조선 후기 인조(1623~1649)때 도화서 화원이었고 술이 없으면 그림을 그리지 않았던 연담(蓮潭) 김명국(金鳴國)입니다. 워낙 술을 좋아해 말년엔 취옹(醉翁)이라는 호를 취합니다. 낮은 신분이 담기 벅찬 뛰어난 재능 탓인지 생년과 졸년은 미상입니다. 두 차례에 걸쳐 조선통신사를 따라 일본에 갔는데 일본인들의 그림요청에 응하느라 밤잠을 자지 못해 울려고까지 했다는 기록이 전합니다. 그는 어떤 그림을 그렸기에 그토록 특별한 인기를 누렸을까요?

1603~1867은 일본 에도시대입니다. 우리들이 아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현 도쿄에 개설한

막부이지요. 그는 내분과 전란이 끝나자 칼을 빛이 나게 벼린 후 조심히 칼집에 꽂았습니다. 그리고 상업과 문화의 부흥에 힘썼습니다. 그 일환으로 에도막부는 우리나라에 통신사를 요청했지요. ‘조선통신사는 17세기 조선의 농밀하고 성숙한 문화를 배에 싣고 에도에 도착했습니다. 드디어 찬란하고 격조 있는 한류문화가 일본 한복판에 내렸습니다.

<달마도>는 김명국이 일본 통신사로 갔던 1636~1643년 사이의 작품이라고 전합니다. 그림을 전혀 모르는 이가 보아도 말로 광야를 내달리는 듯한 호방한 선,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여백과 농담과 생략이 압권입니다. 거침없이 긋고 주저없이 꺾습니다. 부처님이 붓대를 쥔 듯 시작과 끝이 한 호흡처럼 느껴집니다. 배움과 노력으로 그리는 기량이 아니라 천재적인 재능만이 표현할 수 있는 개성이 묻어납니다. 글이나 말을 뛰어넘는 깨달음이 담겨 있어야 한다는 불립문자(不立文字)의 정신이 현현(顯現)하듯 털 한 오라기에도 선()의 침묵이 배어나옵니다. 따라하거나 흉내 낼 수 없지요. 그의 이러한 솜씨를 조선의 문장가 남태응은 신품(新品)이라 칭했고 김명국을 일컬어 신필(神筆)이라 했습니다.

김명국이 일필휘지로 그린 달마는 5세기 말의 인도 선승입니다. 중국 남북조 시대, 양나라 무제는 많은 절을 짓고 불탑을 쌓고 승려를 양성하는 불교 중흥정책을 폅니다. 마침 달마가 인도에서 왔다는 소식을 듣고 궁궐로 초대하고 후한 대접을 한 뒤 내 공덕이 얼마나 큰가를 묻습니다. 달마는 공덕이 없다고 한 마디로 잘라 대답합니다. 칭송을 바라는 공덕은 이미 공덕이 아니라는 뜻을 전한거지요. 무제는 그를 괘씸히 여겨 은밀히 죽인 후 산에 묻어 버립니다. 얼마 후 송운이라는 사람이 벗은 발로 지팡이를 짚고 서쪽으로 가는 달마를 만납니다. 이 사실을 무제에게 아뢰자 무제는 빈 관을 확인하고 군사를 불러 달마를 뒤쫓게 하지요. 양자강 가에 도착한 군사들은 갈대를 타고 강을 건너는 달마를 보게 됩니다. 그야말로 달마 아저씨 갈대 잎 타고 양자강 건너갈 적에가 된 것입니다. 이런 달마의 일화가 <절로도강 折蘆渡江 갈대 한 가지를 잘라 타고 양자강을 건넌 것>이라는 말이 생겨났고 그림으로 그려지게 되었습니다.

갈댓잎을 타고 서쪽으로 간 달마도, 가랑잎을 타고 태평양을 건넌 코끼리도 없는 한적한 오후, ‘술에 취하고 싶으나 아직은 덜 취한 상태에서 최고의 작품이 나왔다는 신필의 술잔에 술을 가득 따르고 싶은 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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