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7 연해주 독립선언 기념식에서 거리 행진을 하는 고려인 청소년들 <고려인독립운동기념비건립추진위, 김신>

“우즈베키스탄 집에서 공항으로 가는 길, 차에서 창밖 보고 있었어요. 그때 나… 생각했어요. 이제 여기 오랫동안 못 올 거 같아.”
인터뷰를 마친 후에도 저 말이 내내 기억에 남았다. 고려인 발레리야는 26살에 방문취업비자(H-2)를 받아 한국에 왔다. 그를 기다리는 것은 말이 통하지 않는 낯선 환경과 장시간 노동이었다. 이제 한국에 온 지도 10년이 됐다.
그럼에도 자신은 한국사회 안에 들어갈 수 없는 존재라 했다. 그 시선이 가르치는 학생들에게도 가 닿는다. 그는 주말이면 고려인지원센터에서 청소년들에게 농구를 가르쳤다.
“저 아이들 여기서 한국인처럼 지낼 수 있을까? 아니라고 생각해요. 아주 어릴 때 오지 않은 이상 가능할까?”
그가 걱정하는 부분이 무엇인지 알 것 같다. 한국에 와서 학교를 5년, 7년 다녀도 또래들과 다른 티가 난다. 다른 것은 한국어 발음만이 아니다. 어릴 때 왔다고 해도 낯선 공간에 적응하는 일은 쉽지 않다.
초등학교 때 고향을 떠나와 지금은 한국에서 고등학생이 된 고려인 청소년들을 만났다.
한국에 오다
고려인들이 어릴 적 가족들에게 묻는 말이 있다.
“우리 한국인이라면서 왜 러시아에 살아요?”
대답을 듣고 나면 다음 질문이 이어진다. 한국은 어떤 나라에요?
“부모님이 그랬어요. 한국에 가면 다 우리처럼 생겼다. 그런 말 자주 들었어요.” (제냐, 17살)
한국에 온 고려인 청소년의 경우, 몇 년간 부모 중 한 명과 떨어져 지낸 경험들이 있다. 어머니나 아버지가 한국으로 일하러 간 것이다. 몇 년 일하다가 이곳이 자녀를 키우기에 적합하다고 판단이 들면 가족 단위로 이주한다.
“아버지가 한국에서 7년 일한 후에 저를 데리러 왔어요. 한국에 왔을 때 미래세계에 온 것 같아서 깜짝 놀랐어요.” (티마, 19살)
그러나 한국은 언어가 다른 나라였다. 학교에 갔지만 대화가 되지 않았다. 다문화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방과후 한글교육을 지원받기도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또래들과 어울리기 힘들다. 친구는 사귈 수 있었을까?
다들 잘 지냈다고 답한다. 애들이 친절했다. 보디랭귀지를 사용했다. 그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여야 할까 고민하는데, 반 친구들과는 학교에서만 논다는 말을 한다. 학교 밖에선 어울리지 않는다. 이유가 무엇일까. 또래들은 수업 끝나고 학원에 가는데 자신은 그곳에 속하지 않아서 일까. “왜 학교 밖에서는 안 만나요?” 여러 이유를 들었지만, 종합해보면 반 친구들과 자신은 다르다는 이야기다. 무엇이 다를까.
다름을 느끼다
18살 니키에게 정체성을 물었더니 엉뚱한 답변이 한다.
“저를 호모사피엔스라 생각해요”
일단 웃고, 다시 물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냐고.
“저는 사람을 민족으로 보는 스타일이 아니라서요. 사람이 사람인데, 왜 국적이나 인종으로 따지나요?”
니키는 한국사람들이 보는 자신을 이렇게 표현했다. ‘같은 나라 사람인데 외국인’. 자신이 받고 있는 외국인 취급을 알고 있다. 니키가 자신은 사람을 민족으로 구분하지 않는다고 강조한 까닭이 여기 있는 듯하다.
한국은 인종, 민족, 국적(나라) 개념이 구분되지 않은 사회이고, 그래서 이 중 하나라도 어긋난 정체성은 받아들이지 못한다. 아니 받아들일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우리에게 근접한 민족(인종)적 타자는 도심에서 보는 관광객과 영미권 영어강사, 그리고 예능 프로그램 방송에 나오는 ‘대한외국인’ 정도다. 
대다수의 이주민은 저임금 노동력으로 분류된 채 눈길 닿지 않는 곳에 머문다. 몇 년 일하다 제 나라로 떠날 존재로 인식된다. 받아들일 필요가 없으니 고민도 없다. 고민의 부재는 고려인이라는 복합적인 역사를 지닌 존재 앞에서도 드러난다.
고려인들이 눈앞에 나타나면 우리는 편리하게 ‘한민족’과 ‘외국인’이라는 개념을 공존시킨다. 사실 그 말이 지닌 의미란, 너는 다른 사람이라는 것뿐이다.
어느 쪽에 더 가까운지
니키는 요즘 마틴 루터 킹 주니어의 연설에 ‘꽂혔다’고 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로 알려진 연설문이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연설보다는 마틴 루터 킹이 가진 소수자성에 끌린 모양이다. 
“마틴 루터 킹은 미국 국적을 갖고 있지만 미국에서 인권을 보장받지 못했어요. 우리랑 비슷하다고 생각했어요. 우리도 민족은 같은데, 같은 민족 보장을 받지 못해요”
니키는 “이것도 인권 문제잖아요?”라고 되묻는다. 같은 민족이라 인정받지 못하고 편견의 대상이 된다. 차별이 아니어도, 이들은 정체성만으로 충분히 혼란스럽다. 특성화고 2학년에 재학 중인 제냐는 자기 정체성을 ‘궁금하다’고 했다.
“저도 궁금해요. 우즈베키스탄에서 태어났는데 한국인이라 해야 하나, 우즈베키스탄는 소련이었잖아요. 그러면 러시아라고 해야 되나. 지금도 잘 모르겠어요. 어느 쪽에 더 가까운지”
궁금하다 했으나 호기심은 아니다. 자신 안에 교차하는 이질적인 정체성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답 구할 곳이 없다. 인종과 민족을 이유로 차별받지 않을 권리를 넘어, 정체성을 고민하고 발견하여 내재할 기회를 누릴 권리 또한 인권이다. 그 기회를 누리는 고려인 청소년들이 얼마나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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