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오풍정]출처 = 구글
[단오풍정] 출처 = 구글
안노라 ▲‘그림으로 만나는 서양사’인문학 강사▲‘벗에게 가는 길’인문학 공간 대표
안노라 ▲‘그림으로 만나는 서양사’인문학 강사▲‘벗에게 가는 길’인문학 공간 대표

한국인이라면 누구에게나 익숙한 혜원 신윤복(1758 ~ ?)의 <단오풍정>입니다. 국보 135호이자, 익숙하게 접했던 작품이라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는 그림이지요. 그런데 이런 작품을 고르다니요? 하지만 며칠 뒤 단오랍니다. 음양사상에 의하면 태양의 기가 가장 강한, 그래서 ‘태양의 축제’인 단오입니다. 창포물에 감은 풍성한 머리를 창포비녀로 꽂아 맵시를 낸 뒤 그네를 타고 쑥으로 만든 수리취떡을 나누어 먹던 우리의 4대 명절 중의 하나이자 이몽룡이 치마를 펄럭이며 그네를 타던 춘향에게 반한 날도 단오이지요. 오늘은 조선의 여인을 사랑한 신윤복의 손끝에서 단오를 읽어 보기로 합니다.
산뜻한 노랑 저고리에 다홍치마를 입고 이제 막 그네를 타려는 여인이 있습니다. 희고 풍성한 속바지 아래, 날렵한 버선코가 일품입니다. 그네에 오른다면 보일 듯 말 듯 한 건 그녀의 속곳이 아니라 그녀의 마음이겠지요? 그녀의 발끝으로부터 관람자의 시선이 미끄러집니다. 45도 정도의 경사를 내려오다 보면 개울가에 목욕하는 여인들이 있습니다. 시원해 보이는군요. 윗저고리를 벗고 찰방거리는 물속에서 몸을 씻고 있는 여인들의 젖가슴과 동그란 엉덩이가 시선을 붙잡습니다. 좀 더 과감한 여인도 있네요. 걷어 올린 치맛단 아래로 치켜 올라간 엉덩이가 드러납니다. 그녀의 자세에 부끄러움은 없습니다. 그녀의 시선을 따라가다 보면 머리에 행상 보따리를 인 여인의 뒷모습이 보입니다. 보퉁이를 잡느라 팔을 올린 겨드랑이와 치마 사이로 뽀얀 사기 주발 같은 젖가슴이 삐져나왔습니다. 젊은 여인이군요. 받쳐 든 저 행상 보퉁이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입술연지나 가채를 장단 할 빗이나 장신구를 담았겠지요? 보따리 안에는 여인의 환상이 있습니다.
보퉁이 위로는 가채를 늘어뜨린 젊고 어린 두 여인의 멀리 가지 못하는 수다가 있습니다.  아무도 그녀들을 보고 있지 않네요. 이제 낙관을 보려는 순간, 숨어있던 그들의 반짝이는 눈이 보입니다. 호기심 가득한 얼굴과 까까머리, 여인들을 훔쳐보고 있는 두 명의 동자승입니다. 그들은 좁고 가는 어깨, 둥그런 엉덩이, 움켜 쥐어보고 싶은 젖가슴을 한 몸에 가지고 있는 여인들이 신기하기만 합니다. 마치 관람자가 들여다보고 있는 듯, 동자승의 시선이 개울가의 아낙네와 그네를 오르려는 여인을 한 풍경으로 붙들고 있습니다. 역시 신윤복의 치밀한 솜씨입니다.
신윤복이 도화서의 화원으로 있을 때는 상공업이 발달하고 한양이 번성했던 정조 시기였습니다. 광통교와 운종가에는 밤마다 홍등이 켜졌고 기생들의 노랫가락이 담을 넘었습니다. 조선은 성리학의 나라였고 신분제를 바탕으로 한 유교관이 사회를 지배했던 왕조였습니다. 그러나 건국 후 250여년을 지탱한 이념들은 왜란과 호란을 거치며 부패가 가속화 됩니다. 또한 성리학적 질서와 도덕은 급격한 도시화에 의해 무너지기 시작하지요. 폐쇄적이면서도 이중적인 사대부의 윤리관은 성리학이 지배한 사회의 가장 아픈 부분이었지요.
사치와 향락에 빠진 양반을 비판하거나 인간 본연의 욕망에 해학을 입히는 신윤복 특유의 풍속화는 변화하려는 시대가 잉태한 서자였을 것입니다. 그는 18세기 말, 발칙한 아웃사이더였고 날라리였으며 본분을 망각한 반항아였습니다. 그의 감각적 색채와 구도는 그동안 중국의 영향 아래 있던 화단에 충격을 줍니다. 일설에는 춘화를 즐겨 그려 도화서에서 쫒겨 났다고 합니다. 그는 영조의 어진을 두 차례나 그렸다는 신한평의 아들로서 죽지 못했습니다. 그래서인지 졸년이 미상입니다. 그의 천재적인 솜씨도 완고한 성리학적 질서를 이기지 못했던 것일까요? 어느 한가한 기방에서 앳된 기녀의 무릎을 베고 거문고 소리를 듣고 있을 그를 그려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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