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모자를 쓴 잔 에뷔테른    그림출처 = 구글
큰 모자를 쓴 잔 에뷔테른 그림출처 = 구글
안노라 ▲‘그림으로 만나는 서양사’인문학 강사▲‘벗에게 가는 길’인문학 공간 대표
안노라 ▲‘그림으로 만나는 서양사’인문학 강사▲‘벗에게 가는 길’인문학 공간 대표

결혼을 했다는 것은 법적으로 ‘남편’이, ‘아내’가 있다는 말입니다. 주민등록 등본 가족관계에 부부의 이름이 들어갈 것입니다. 이 이름으로 인해 의료보험에는 부양인과 피부양인이 기재됩니다. 통장에는 세금과 핸드폰비가 빠져 나가고 각종 보험 계약서가 작성됩니다. 만일 남편이나 아내가 사망하면 대신 연금을 수령할 자격을 갖습니다. 공식적인 모임에 나란히 서서 미소를 띤 인사를 합니다. ‘자신의 남자’ 또는 ‘자신의 여자’가 있다는 선언이겠지요.
이 땅에서 만이 아닌 천국에서까지 서로 ‘영혼의 수령인’이 된 연인이 있습니다. 뜨거운 사랑으로 ‘나의 사랑, 나의 여인’을 그렸던 모딜리아니와 그의 연인이자 뮤즈인 ‘잔 에뷔테른’입니다. 오늘은 작품과 함께 그와 그녀의 사랑이야기를 들려 드리고 싶습니다.
피카소나 반 고흐의 작품만큼이나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아메데오 모딜리아니(Amedeo Modigliani 1884~1920)의 <큰 모자를 쓴 잔 에뷔테른>입니다. 만일 우리가 실제로 이 그림을 본다면 어떨까요? 아마도 금방 눈물이 쏟아지겠지요? 무한한 애수가 깃든 목과 어깨, 우아하고 상념이 담긴 긴 손가락, 점점 말을 잃어가는 입술, 고고하게 살짝 기울어진 코, 무언가를 바라보지만 초점을 알 수 없는 푸르고 파란 눈. 이 모든 이미지를 상냥하게 감싸는 크고 넓은 모자. 갈색과 초록이 밀거나 당기지 않고 스며들 듯 어울린 배경까지 절제된 우수와 쓸쓸함을 느낄 수 있는 그림입니다. 눈동자가 없는 그녀의 푸른 눈은 아직 모딜리아니를 추억하고 있을까요?
모딜리아니는 이탈리아에서 태어났습니다. 몹시 가난했고 어릴 때부터 허약했지만 그림에 재능이 있었습니다. 14세에 병으로 학교를 중단했고 17세엔 결핵으로 요양하게 됩니다. 안타까웠던 어머니는 어려운 형편에도 잦은 여행과 요양으로 모딜리아니의 몸을 돌보아주고 그림공부를 할 수 있도록 최대한 지원합니다. 그가 피렌체에서 베네치아로 그리고 22살에 파리로 가기까지 어머니의 후원은 큰 힘이 됩니다.
그 때나 지금이나 높은 언덕위의 집은 임대료가 쌌었나 봐요. 1906년 파리 몽마르뜨 언덕에 아틀리에를 빌려 조각을 시작합니다. 이때, 아프리카의 원시 토속예술과 만나게 되지요. 하지만 돌가루가 날리는 조각은 몸이 약했던 모딜리아니의 폐를 상하게 했습니다. 그는 조각가에서 화가로 작업형태를 바꾸고 1912년, 파리 가을 미술전에 작품을 출품했지만 주목받지 못했습니다. 그림은 팔리지 않았고 초상화 한 점 당 10프랑 밖에 받지 못하는 가난한 예술가의 삶이 시작되었습니다.
34살에 몽파르나스의 카페에서 화가 지망생, 잔 에뷔테른을 만납니다. 부유한 집 딸과 방탕하고 가난했던 모딜리아니의 만남은 잔 부모님의 반대에 부딪칩니다. 하지만 잔은 술과 마약으로 쇠약해진 모딜리아니의 유일한 뮤즈였고 온전한 사랑이었습니다. 잔과 함께 한 3년의 시간동안 꺼져가는 불꽃이 마지막 환하게 피어나듯 예술가로서 폭발적인 열정을 캔버스에 쏟아 붓습니다. 그는 1920년 결핵성 뇌막염으로 죽습니다.
모딜리아니가 죽기 전 그녀는 그에게 말합니다.
“천국에 가서도 당신의 모델이 되어 드릴게요” 얼마 뒤, 잔 에뷔테른은 그녀 부모님의 집, 5층에서 뛰어내려 그를 뒤따라갔습니다. 그녀의 몸에 8개월 된 아이가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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