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리우스 2세'                                                          그림출처 = 구글
'율리우스 2세' 그림출처 = 구글
안노라 ▲‘그림으로 만나는 서양사’인문학 강사▲‘벗에게 가는 길’인문학 공간 대표
안노라 ▲‘그림으로 만나는 서양사’인문학 강사▲‘벗에게 가는 길’인문학 공간 대표

“끄응”하는 신음 소리가 들릴 듯합니다. 몹시 고단해 보이는 노인이 앉아 있군요. 하지만 입고 있는 붉은 망토와 모자는 그의 신분이 예사롭지 않은 것을 나타냅니다.
예부터 자주색과 붉은 색은 고귀한 신분을 나타내는 색이었으니까요. ‘참나무’라는 뜻을 가진 그의 가문을 상징하는 도토리 장식과 술이 많은 고풍스런 의자에 위엄과 경건을 갖추고 앉아 있습니다. 왼 손은 의자의 팔걸이를 힘주어 감싸 쥐고 있네요. 의자에서 떨어져서는 안 되겠다는 내면의 의지를 나타낸 것일까요?
흰 주머니를 잡고 있는 오른 손가락에는 여러 개의 반지가 끼워져 있습니다. 그가 전통 있는 지위에 있으며 권력의 크기가 크다는 표시겠지요. 몸을 따라 흐르는 주름은 그를 부드럽게 감싸고 무릎까지로 절개된 그림의 구도는 왕족의 초상화를 연상시킵니다. 노인의 뒤에는 무게감이 느껴지는 초록색 커튼이 드리워져 있고 커튼 위로 십자 모양의 교황의 열쇠가 그려져 있습니다.
초상화는 단순히 인물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인물이 품고 있는 역사의 한 부분과 시대를 드러내 줍니다. 인물은 시대를 살아가는 생생한 증인이기 때문이지요.
이 작품은 라파엘로 산치오(Raffaello Sanzui 1483~1520)가 그린 <율리우스 2세>입니다. 율리우스 2세는 성직자로서의 ‘교황’이었다기보다 ‘교황령의 군주’인 정치가이자 군인으로 더 잘 알려져 있습니다. 교황청에 압력을 넣는 주위 강대국으로부터 ‘신의 땅’을 지키려 했던 그는 때로는 외교적 책략으로, 때로는 정치적 배신과 음모와 연대로, 또 때로는 신앙을 수호하는 신의 종복으로 평생을 분투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깊고 그늘진 눈에서 고단함과 순종과 의지를 동시에 읽게 되는 것은 오로지 탁월한 기량으로 초상화를 완성한 라파엘로 산치오의 예술 때문입니다.
라파엘로 산치오는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와 더불어 르네상스의 3대 화가입니다.
또한 ‘바오로 3세’를 그린 티치아노, ‘이노켄티우스 10세’를 그린 벨라스케스,  ‘비오 7세’를 그린 다비드와 함께 역대 교황의 초상화를 그린 네 사람 중 한 사람이지요.
그의 위대함은 흉내 낼 수 없는 작품에 있기도 하지만, 진정한 크기는 천재적 재능에도 불구하고 시대와 다정하게 걸음을 맞추었고 삶과 사람에 대해 언제나 상냥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쉽게 경쟁하지 않았습니다. 다빈치의 작품을 보고 인체의 모습을 신중히 관찰하였고 미켈란젤로의 천장화를 본 뒤, 과감히 자신의 작품에서 나약한 선을 제거하고 장엄함과 종교적 무게를 얹었습니다. 매번 무릎을 꿇어 그들에게 배웠고 그때마다 더 큰 거인의 모습이 되었습니다. 그가 죽었을 때, 벰보 추기경은 “대자연은 그가 무사할 때 그에게 정복당할까 두려워하였고 그가 죽을 때 자기도 따라죽을까 두려워하였다.”는 말로 그의 탁월한 예술성을 증거 하였습니다.
예술과 문화의 부흥을 이끌었던 율리우스 2세는 라파엘로에게 바티칸 홀의 벽면을 장식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는 이곳에서 지금까지도 우리에게 정진의 채찍을 들게 하는 프레스코화를 탄생 시킵니다.
역대 교황들의 집무실인 ‘서명의 방’ 에는 철학, 신학, 시학, 법학의 네 가지 학문 분야를 표현한 <아테네 학당>, <성체의 논의>, <파르나소스>, <삼덕상>이 그려져 있습니다. 문화와 예술의 자궁이었던 르네상스는 위대한 거인, 라파엘로의 힘을 빌려 신이 아닌 인간을 출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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