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지와 재미, 무엇 하나 제대로 잡지 못했다.
영화 ‘나랏말싸미’는 세종이 죽기 전 신미 스님에게 ‘우국이세 혜각존자’(祐國利世 慧覺尊者; 나라를 위하고 세상을 이롭게 한, 지혜를 깨우쳐 반열에 오른 분)란 법호를 내렸다는 설, 김만중의 ‘서포만필’에 등장하는 훈민정음과 산스크리트어와의 관계 등을 근거로 상상력을 보태 완성한 작품이다.
‘나랏말싸미’는 그러나 검증되지 않은, 근거가 희박한, 신미 스님에게 도움을 받아 한글을 만들었다는 가설을 마치 다큐멘터리처럼 고증한다.
불교의 경전은 산스크리트어 등 표음문자를 기반으로 한다. 극중 불자 소헌왕후(전미선)는 글자를 만들기 위해 분투하던 세종(송강호)에게 산스크리트어, 티베트어, 파스파 문자에 능통한 승려 신미(박해일)를 소개한다. 신미는 세종을 도와 한글을 창제한다.
신미는 조력자이기보다 한글 창제의 주역으로 묘사된다. 전체관람가인 이 영화의 설정이 아이들에게 왜곡된 역사관을 심어줄 수도 있겠다는 염려가 인다.
포스터만 봐도 결말을 알 수 있는 유의 영화다. 얼마나 뻔하지 않게 전개하느냐가 영화의 성공을 위한 열쇠라 할 수 있다. 극적 갈등을 부각시켜 뻔함에서 벗어날 수 있는 여지가 있었지만, 실패했다.
대국인 명나라의 눈치만 살필뿐 세종에게 협력하지 않는 신하들과의 관계, 불자들에게 불교의 가르침을 전하고자 한글 창제에 뛰어든 신미와 백성들을 위해 한글을 창제하려는 세종의 다른 목적 등은 갈등의 씨앗이다. 이를 통해 갈등을 좀 더 가시화해 극에 긴장감을 불어넣을 수 있었건만, 그렇게 하지 못했다.
물론 중후반부에 갈등의 요소가 약간 있지만 발단-전개-위기의 ‘위기’ 수준으로 그려지지 않는다. 신미와 세종은 갑작스레 갈등하고, 한글 창제를 위한 노력은 중단된다. 애초 그들을 이어준 이가 소헌왕후인만큼 그들을 다시 이어주는 고리도 소헌왕후다.
하지만 이 둘이 갈등한 이유, 소헌왕후의 죽음을 계기로 이 둘이 다시 만난다는 설정 모두 개연성과 설득력이 떨어진다.
극적으로 그려내지 못했을뿐더러, 그 작은 갈등마저도 관객들을 납득시키는 데 실패한다. 영화가 강조하고자 한 메시지는 불분명하다. 그나마 어느 정도 드러나는 부분은 여성혐오(여성을 남성보다 하등한 존재로 객체화하는 것)에 대한 반기다.
감독은 시사회에서 세종과 신미 둘을 졸장부, 소헌왕후를 대장부로 묘사했다고 말한 만큼 여성의 능력을 강조하고자 애썼다. 한글이 탄생하는 계기를 만들고, 한글의 전파에 힘쓴 사람도 소헌왕후로 그려진다. 상궁, 나인들도 이에 일조한다.
감독이 의도한대로 소헌왕후는 대장부이자, 두 졸장부의 갈등을 봉합하는 존재로 묘사된다. 전반부에서는 소헌왕후를 주체적인 여성상으로 잘 표현한다.
그러다가 중후반으로 와서는 소헌왕후의 결단력이 아닌, 그녀의 죽음으로 문제를 해결한다. 소헌왕후 원래의 캐릭터는 그렇게 희석돼 버린다.
배우들의 호연은 돋보인다. 그나마 중반까지 흥미롭게 볼 수 있는 것은 송강호(52), 박해일(42), 전미선(1970~2019)의 연기 덕분이다.
송강호는 백성들에 대한 애정이 넘치지만 신하들의 반대에 밀려 이를 정책적으로 펼 수 없는 세종의 고민과 좌절, 그리고 한글창제를 통한 희망을 여실히 보여준다. 박해일은 당시 가장 미천한 존재이지만, 왕 앞에서도 꼿꼿하고 올곧은 신미 스님을 적절히 표현해 냈다. 전미선은 현명하면서도 내면이 강한 여장부의 모습을 온전히 보여줬다.
영화 속 명사찰들의 아름다운 모습은 눈을 즐겁게 한다. 조철현 감독은 6개월 이상 문화재청에 요청한 끝에 합천 해인사 장경판전부터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안동 봉정사까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문화 유적을 스크린에 담아냈다.
한국의 3대 사찰 중 하나인 해인사의 장경판전은 팔만대장경판의 온전한 보존을 위해 내부 출입이 불가능하다. 관객들은 영화를 통해 팔만대장경의 실물을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다.
조철현 감독은 오랫동안 제작자와 각본가로 활동했다. 2015년 송강호와 유아인이 주연한 ‘사도’의 각본을 썼다. 2010년 개봉한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에서는 제작, 기획, 각본을 맡았다. ‘아내가 결혼했다’를 공동제작하고 ‘황산벌’에 제작, 기획, 각본으로 참여했으며 ‘달마야 놀자’를 기획했다. 이번 영화는 그의 감독 데뷔작이다.
이 작품은 이따금씩 들어가 있는 유머코드로 때때로 웃음을 자아낸다. 극 전체를 이끌어나갈 긴박감이나 긴장감을 주지 못할 것이라면, 차라리 진지함을 좀 빼고 웃음으로 극의 빈틈을 메웠으면 어땠을까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24일 개봉, 11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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