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바다 위의 방랑자그림출처 = 구글
<안개바다 위의 방랑자> 그림출처 = 구글
안노라 ▲‘그림으로 만나는 서양사’인문학 강사▲‘벗에게 가는 길’인문학 공간 대표
안노라 ▲‘그림으로 만나는 서양사’인문학 강사▲‘벗에게 가는 길’인문학 공간 대표

슈베르트의 아버지는 아들이 음악가가 되는 걸 반대했습니다. 거듭된 권유로도 슈베르트의 결심을 꺾지 못하자 경제적 지원을 중단합니다.
슈베르트는 극도의 경제적 궁핍과 친구 집을 전전하는 고독한 상태에서도 빼어나고 유려한 곡을 작곡하여 우리에게 남겼습니다.
지구별의 외로운 방랑자 같았던 자신의 마음을 옮긴 걸까요?
작품 중 <방랑자 환상곡 Der Wanderer>이 있는데 그 CD의 표지가 오늘 소개할 독일의 낭만주의 대표 화가 카스파트 다비드 프리드리히(Caspar David Friedrich  1774~1840)의 <안개바다 위의 방랑자> 이었습니다.
한 남자의 뒷모습이 보입니다. 그는 거칠고 어두운 바위 위에 지팡이를 의지해 서 있습니다.
한 발을 앞으로 내 딛었지만 전진을 위한 것은 아닌 것 같군요. 차분한 그의 자세가 절제하는 행동을 상징한다면 살짝 숙인 머리는 마음의 일렁임을 말하는 듯합니다.
우리는 그의 표정을 볼 수 없습니다. 그저 무거워 보이는 어깨와 바위를 딛고 있는 다리에서 광활한 자연 앞에 간신히 버티고 있는 단독자의 외롭고 고독한 풍경을 읽을 수 있을 뿐입니다.
그의 앞에는 너울이 이는 바다처럼 끝이 보이지 않는 안개가 출렁입니다. 더 멀리, 더 멀리 아득한 곳엔 하늘과 땅의 경계가 없습니다.
그는 자연스럽게 그의 시선이 닿는 곳으로 관람객의 시선을 유도합니다. 마치 내가 서 있는 듯, 무한히 확장된 시야 앞으로 신비롭고 숭고한 풍광이 펼쳐집니다.
장엄한 자연 앞에서 그는 무엇에 귀 기울였을까요?
카스파트 다비드 프리드리히는 독실한 루터파 신자인 아버지의 엄격한 종교교육을 받았습니다.
아버지는 양초와 비누를 만드는 수공업자였고 근면했으며 교리에 따른 절제와 부지런함, 쉬지 않는 기도를 가르쳤습니다. 아버지가 삶의 방식을 가르쳤다면 신은 죽음의 형태를 보여주었습니다.
프리드리히가 7살 때 천연두에 걸려 어머니가 사망했고 다음 해에는 누이 엘리자베스가 죽었습니다. 신은 그를 한 번 더 시험합니다.
13세 때, 스케이트를 타다 얼음이 깨지자 프리드리히를 구하려던 동생이 얼음에 빠져 죽습니다. 동생의 죽음을 지켜봐야 했던 그는 자주 고독했고 내성적이 되었습니다.
이어 1791년엔 두 번째 누이가 병을 이기지 못하고 떠납니다. 죽음은 그에게 아주 가까웠고 삶은 낯설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프리드리히에게 있어서 나무는 잘라져 밑동만 남아있거나 묘지 옆의 앙상한 고목들입니다.
하늘은 변덕스럽고 음울하며 바다는 채찍을 맞아 시퍼렇게 멍들어 있습니다. 폐허가 된 수도원에서는 쓸쓸한 장례식이 열립니다.
날 선 바람이 부는 황량한 얼음의 대지에 희망 잃은 범선이 시간의 풍화를 견디고 있습니다.
한 편의 음유 시를 보듯 그의 작품은 풍경의 껍질이 아닌 속살을 다룸으로 재현이 아닌 은유와 상징이 되었습니다.
프랑스 조각가인 다비드 당제르(David d’Angers)는 그를 ‘풍경화의 비극을 발견한 화가’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북구 특유의 사색적이고 중세적 아우라가 있는 ‘안개바다 위의 방랑자’는 자연이라는 위대한 신의 계시 앞에 엎드린 인간의 고독한 내면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계몽’과 ‘이성’이라는 가치가 시대를 장악했을 때, 오히려 신의 질서에 엎드려 시련과 고통을 이길 수 있는 무한한 은혜를 갈구했던 외로운 예술가의 기도가 들려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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