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출처 = 구글
안노라 ▲‘그림으로 만나는 서양사’인문학 강사▲‘벗에게 가는 길’인문학 공간 대표
안노라 ▲‘그림으로 만나는 서양사’인문학 강사▲‘벗에게 가는 길’인문학 공간 대표

 강렬하지요! 화면 전체에서 에너지가 나오는 선동적인 그림입니다. 1830년 7월 혁명, 3일간의 뜨거움을 그린 외젠 들라크루아(Ferdinand Victor Eugene Delacroix 1798~1863)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입니다. 그 폭풍 한복판으로 가볼까요?
화면 가운데, 오른 손에는 삼색기를, 왼 손에는 장총을 들고 가슴을 드러낸 여인이 있습니다. 그녀는 무리를 이끌며 팔을 높이 들어 앞으로 나아가자고 합니다. 현재 프랑스 국기인 청색(자유), 백색(평등), 적색(박애)의 삼색 깃발이 민중의 열망만큼 거칠게 펄럭이고 있습니다. 그녀의 발은 바리케이트를 넘어 자유의 땅으로 전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가슴을 드러내고 있는 것은 왜일까요? 그녀는 누구일까요?
유럽 미술의 전통에서 가슴을 드러낸 여인은 고결한 여신을 나타내고 가슴을 드러내어 젖을 물리고 있는 도상(圖像)은 카리타스(Caritas)를 의미 합니다. 기독교 교리를 담고 있는 성모자화(聖母子畵)에 근거해 사랑과 자비를 상징하는 것이지요. 후에는 국민을 섬기고, 생존에 책임을 지는 공화국의 의미로 변했습니다. 가슴을 드러내고 삼색기를 들고 있는 역동적이며 강인한 그녀는 프랑스 ‘자유의 여신 마리안느’입니다. 마리(Marie)는 ‘동정녀 마리아’이고 안느(Anne)는 ‘마리아의 어머니’를 뜻하는 프랑스의 가장 흔한 이름입니다. 권력의 주체가 세습 왕족에서 투표를 통해 국민에게 이양되어야 한다고 믿었던 프랑스 대혁명이 들불처럼 번질 때였지요.
사람들은 ‘자유’와 ‘평등’이라는 이념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싶어 했습니다. 이리하여 그녀는 프랑스의 정체성을 대표하는 이름으로, 고대 로마 노예들이 해방될 때 쓰던 붉은 프리기아 모자를 쓰고 1789년에 태어났지요.
프랑스 혁명은 60여년에 걸친 대서사입니다. 1789년 혁명 후, 대다수의 국민들은 인권과 생존이 보장되는 나라를 만들고 싶었지만 로베스피에르의 공포정치가 시작되었습니다. 자신이 만든 공포의 덫에 걸린 로베스피에르가 무너지자 유럽 전체를 상대로 싸웠던 나폴레옹의 제국이 등장했습니다. 그의 긍지는 곧 자만으로 바뀌었고 황제는 유배되었습니다. 이에 대한 반동으로 1815년, 루이 16세의 동생들인 루이 18세와 샤를 10세가 연이어 왕위에 올라 복고와 전제정치가 시작되었습니다. ‘자유와 평등’의 기치를 들고 민중들은 다시 한 번 일어섭니다. 1830년 7월 27일, 시위대는 왕궁으로 향했고 샤를 10세는 영국으로 망명했습니다.
들라크루아는 이 때의 심정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조국의 승리를 위해 직접 싸우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조국을 위해 이 그림을 그리고자한다” 마리안느 왼쪽에 실크햇을 쓰고 장총을 들고 있는 신사가 들라크루아라는 말도 있습니다. 자신의 작품에 슬쩍 자화상을 그려 넣는 것은 화가들이 갖는 일종의 서명 같은 것이었으니 일견 설득력 있는 설이기도 합니다. 신사 뒤에는 긴 칼을 들고 허리춤에 총을 찬 시민군이 보입니다. 마리안느 오른 쪽, 양 손에 총을 든 어린 소년은 두려움이 없어 보입니다. 가슴 속, 폭풍을 안고 전진하는 시위대는 프랑스의 미래를 만들었습니다.
이 그림은 1831년 살롱 전에 출품되었고 당시 루이 필립 1세가 3,000프랑으로 구입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수장고에 넣어 둡니다. 이 그림이 가진 상징성이 강해 호의적이지 않은 또 다른 시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하지요. 오랜 시간이 지난 뒤 루브르에 전시되었습니다. 이 그림은 국민들의 환호와 열광 속에 프랑스 민주주의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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