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책연구기관 한국개발연구원(KDI)이 반년째 ‘경기 부진’ 진단을 이어가고 있다.

KDI는 특히 대내외적으로 ‘수요’가 위축되고 있음을 명확히 했다. 수요의 활력이 낮아지고 있다는 정도의 정부 분석보다 우려의 수위가 높다. 최근의 저(低)물가 상황은 적어도 11월까진 지속되리라는 예측이다.

KDI는 8일 발표한 ‘KDI 경제 동향’ 9월호에서 최근 우리 경제 상황에 대해 “대내외 수요가 위축되며 전반적으로 부진한 모습”이라고 평가했다.

KDI가 매월 내놓는 동향 보고서에서 수요 위축이 명시적으로 언급된 것은 처음이다. 경기가 부진하다는 진단은 6개월째 지속됐지만 그간 투자와 수출을 중점적으로 언급했던 것과 달리 이번엔 ‘전반적으로’ 부진하다는 분석이 덧붙여졌다.

김성태 KDI 경제전망실장은 “지난달과 상황이 크게 다르진 않지만 이번엔 소비가 특히 부진했다”고 설명했다.

KDI에 따르면 지난 7월 소매판매액은 전년 대비 0.3% 감소했다. 가전제품(-18.2%) 등을 중심으로 내구재가 -3.4%의 감소율을 기록했다. KDI는 “7월 기온이 작년보다 낮아진 데 따라 에어컨 판매가 부진하면서 가전제품이 큰 폭으로 감소했다”며 “이러한 흐름은 8월에도 지속될 것”이라고 판단했다. 이밖에 의복(-2.6%) 등 준내구재도 0.4% 줄었다. 이에 소비자심리지수도 지난 8월 기준 전월(95.9)보다 3.4포인트(p) 하락한 92.5를 기록했다.

최근 물가 상황과 관련, KDI는 “수요 위축에 공급 측 기저효과가 더해지며 0%까지 하락했다”고 진단했다. 수요 측 요인을 명시하지 않고 있는 정부와 비교되는 모습이다. 정부는 최근 저물가 상황엔 공급·정책적 요인이 주로 기여했고 수요 측 요인은 일부만 작용했다고 설명한다. 김용범 기획재정부 1차관은 “경제 하방 압력이 커지면서 수요 활력이 다소 낮아진 것은 맞다”는 정도로 언급했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달 소비자물가지수 상승률은 0.0%에 그쳤다. 소수점 둘째 자리까지 넓혀 보면 -0.04%를 기록, 1965년 통계 작성 이래 사상 처음으로 마이너스(-)다. 1년 전 폭염으로 농산물 가격이 크게 뛰었던 데 따른 기저효과가 크게 작용했다. 농산물 가격이 전년 대비 11.4% 폭락하면서 농축수산물 가격 상승률도 -7.3%를 기록했다.

유류세 인하, 국제유가 하락 등에 따라 석유류 가격 역시 하락 폭이 확대됐다. 이에 공업제품 가격도 -0.2%의 상승률을 보였다. 서비스 물가 상승률도 1.0%에 그쳤으며 전국 아파트 매매가격(-0.14%)과 전셋값(-0.14%) 등은 하락 폭이 소폭 축소됐다.

다만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근원물가(식료품및에너지제외지수) 상승률이 0%대 후반에서 형성돼 있어 일시적인 공급 측 요인들이 소멸되는 올해 말부터는 물가가 반등할 것으로 KDI는 내다봤다. 근원물가는 지난달 0.8% 오르며 6개월째 0%대에 머물고 있다. 김 실장은 “기저효과에 따른 농축수산물 가격 하락으로 10월까지 마이너스 물가가 지속될 것”이라며 “11월엔 다시 0%대를 회복한 후 12월께 플러스(+)로 반등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수출과 투자 등 그간 경기를 끌어내렸던 요인도 부진을 면치 못하고 있다.

지난달 수출 감소 폭은 전월(-11.0%)보다 확대된 -13.6%를 기록했다. 반도체(-30.7%)와 석유화학(-19.2%), 석유제품(-14.1%) 등 주요 품목들이 대부분 부진했다. 세계 교역량이 감소세를 이어가고 있는 데다 OECD 선행지수(99.1)도 하락세를 지속하는 등 대외 수출 여건이 악화되고 있다고 KDI는 분석했다. 수출이 수입보다 큰 폭으로 감소하면서 상품수지 흑자 폭도 계속해서 축소되고 있다.

7월 설비투자 증가율은 -4.7%로 전월(-9.0%)보다 감소 폭이 축소됐지만 특수산업용기계(-16.2%) 등 반도체 산업 부문에서는 부진이 지속됐다. 기계류 내수출하지수의 감소 폭이 -12.1%로 전월(-11.0%) 대비 확대된 것은 부진이 지속될 것임을 시사한다고 KDI는 봤다. 설비투자 선행 지표인 자본재 수입액은 지난달 -8.8% 감소했고 반도체제조용장비 수입액은 -34.9% 감소해 전월(-27.2%)보다 폭이 확대됐다.

건설투자도 주거 부문을 중심으로 감소세가 지속됐다. 7월 기준 건설기성(이미 이뤄진 공사 실적)은 -6.2% 감소했다. 발전·통신, 도로·교량 등 토목 부문이 큰 폭으로 감소하면서 건설수주는 -23.3% 크게 줄었다. 주택인허가(-52.7%)와 주택착공(-8.7%)이 모두 감소해 주거용 건축도 부진이 지속될 가능성이 큰 상황이다.

광공업·서비스업 등에서의 생산 지표는 7월 기준 증가 폭이 다소 확대됐지만 조업일수가 1일 증가한 일시적인 요인을 고려하면 계속해서 부진한 상황이라는 판단이다. KDI는 “7월 생산 확대는 조업일수 증가에 주로 기인했다는 점에서 경기 부진이 완화된 것으로 해석하긴 어렵다”고 지적했다.

통상 관련 불확실성이 확대되면서 금융시장이 요동쳤다. 미·중 갈등이 심화되면서 원·달러 환율이 1200원대로 급등했고 외국인 투자자금이 빠져나가면서 종합주가지수(KOSPI)는 2000 아래로 곤두박질쳤다. 투자자들 사이에서 안전자산 선호 심리가 강화되면서 국고채 금리는 1.17%로 하락했다. 장·단기 금리 차가 확대된 것에 향후 경기에 대한 우려가 반영됐다고 KDI는 분석했다.

고용 시장은 유일하게 활기를 띤다. 7월 취업자 수는 29만9000명으로 30만명에 육박했다. 제조업, 건설업 등에서 부진했지만 서비스업과 농림어업에서 증가 폭이 확대됐다.

이종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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