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호취도>   출처 = 구글

 

안노라 ▲‘그림으로 만나는 서양사’인문학 강사▲‘벗에게 가는 길’인문학 공간 대표
안노라 ▲‘그림으로 만나는 서양사’인문학 강사▲‘벗에게 가는 길’인문학 공간 대표

 

 

  아름다운 건 나약하기 쉽고 강한 건 거침을 피하기 어렵습니다. 고고한 기품이 있되 고졸한 용모가 어우러지고 박진(迫眞)한 기세가 있되 속되지 않은 도량이 있기도 어렵습니다. 굳세면서도 부드럽고 정치(精緻)하면서도 담박한 작품도 쉽지 않습니다. 오늘은 수집해 익히고 묵묵히 연구한 그림이 아닌 활달한 필선으로 웅혼한 기상을 드러낸 작품을 소개합니다. 구한 말, 쩨쩨하고 전통에 얽매인 문인화(文人畵) 대신 감각적인 회화의 필력을 선보인 오원 장승업(吾園 張承業 1843~1897)의 호취도(豪鷲圖)입니다. 
심박수가 100을 향해 치솟고 있지요? 단박에 기세가 대단한 두 마리 수리의 긴장이 느껴집니다. 수리는 자세부터 아우라가 넘칩니다. 아래 나뭇가지에 앉은 수리의 위로 젖힌 몸통을 보세요. 흐르는 어깨, 나뭇가지를 움켜 쥔 다부진 발톱, 가지런하고 절제된 깃, 상대의 움직임을 제압하는 두 눈에는 팽팽한 에너지가 느껴집니다. 매운 눈빛을 상대하고 있는 윗가지의 수리는 몸을 비틀어 아래를 응시하고 있습니다. 잽을 날리기 전 체중과 속도를 버티는 권투선수의 두 다리만큼 꽁지는 위로 솟구쳐 있습니다. 틈을 노리는 맹수의 결기와 숨죽인 고요가 느껴집니다. 두 수리를 품고 있는 고목의 줄기는 망설임 없이 단 한 번의 붓질로 쳐낸 힘센 필세가 대담합니다. 붓의 농담을 자유자재로 구사했던 신필(神筆)의 역량이기에 가능한 강건함입니다. 몰골법으로 죽죽 그어 내린 고목과는 달리 나무 잎사귀는 연한 채색으로 속도감을 떨어뜨렸습니다. 바위 중간의 갈대와 꽃들도 섬세한 묘사에 생생함이 넘칩니다. 화면은 꺾이고 뻗쳐있는 선들의 호방함으로 세련되고 멋스러우며 우둔하거나 옹졸한 이해타산이 끼일 틈이 없습니다. 조선의 그림은 시(詩), 서체(書體), 화(畵)가 기본입니다. 왼쪽 상단의 시는 조선 말 서화가 정학교가 썼습니다. “넓은 땅 높은 산은 의기를 더해주고 해묵은 풀포기는 정신을 늘려준다” 
장승업은 고아에 까막눈이었습니다. 그는 비렁뱅이로 거리를 떠돌았습니다. 그림에 재능이 있음을 알아본 지물전 이응헌이 어린 장승업을 거두었다고도 하고 역관 변원규가 키웠다고도 합니다. 장승업은 어깨 너머로 그림의 이치를 깨우칩니다. 닥치는 대로, 붓 가는 대로 임모(臨摸)와 방작(倣作)의 시기를 지나고 난 그는 산수, 인물, 영묘, 기명절지, 사군자 등 모든 영역에 뛰어난 실력을 보입니다. 그는 사대부들이 성리학적 수련 방법으로써 그렸던 그림이 아닌 그림쟁이로서의 오롯한 회화를 지향 했습니다. 당시 조선 회화는 경제변화를 토대로 한 신흥 상공업자와 부농(副農)이라는 새로운 수요층이 생기던 시기였습니다. 단아하고 풍류 넘치는 서재를 갖고 싶었던 신흥 부유층들은 다투어 그에게 그림을 주문했습니다.
그는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고 당대의 유력자만이 그의 그림을 가질 수 있었다고 전합니다. 하지만 대상의 본질을 통찰하고 드러낼 만한 인문적 경험과 학식이 부족했던 그는 문기(文氣)가 없고 조형의식이 빈약하며 작품에 옥석(玉石)이 섞여 고르지 못하다는 평을 받기도 합니다. 아마도 그의 그림솜씨만을 취하는 고압적인 세도가의 주문에서 미천한 상노(床奴) 출신인 그가 자신의 예술세계를 지키기에는 벅찼을 것입니다. 바람과 소리조차 화폭에 풀어 놓을 줄 알았던 그는 자주 절망했고 술로 도피했습니다. 술과 여인 없이는 그림을 그릴 수 없다고 했지요. 고종이 궁으로 불러 병풍제작을 맡겼을 때, 그는 궁궐을 빠져 나가 술을 마시곤 했습니다. 자유롭고자 하는 그의 갈망은 왕조차 가두지 못했습니다. 그는 신선이 됐다고도 하고 기녀의 치마폭에 산수갑산을 그리다 사라졌다고도 합니다. 그의 분분한 뒷모습을 저 바람이 보았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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