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선당 혜운 스님
운선당 혜운 스님

내가 바로 보기 위해서는 마음에서 생각을 걷어내야 합니다.
동물은 오직 먹기 위해, 먹이를 얻기 위해 집중을 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사유와 동시에 잡념을 동반하는 유일한 동물입니다.
사유를 유용하게 이용하면 내가 사는 이 세상을 굳건하게 헤쳐 나갈 힘이 되지만 동시에 한 생각이 잘 못되면 인간의 몸을 갉아먹는 바이러스나 병원균처럼 무서운 존재이기도 한 것이다.
진정 사람을 맥 빠지게 하는 것은 “나는 안 돼”라는 좌절이나 더 이상 일어설 수가 없다는 현실적인 실패가 아니라 더 이상 어떠한 노력을 해도 안 된다는 생각이나 실패라고 믿는 망상, 곧 전도된 생각이 나를 더욱 힘들게 하는 것이다.
어제(과거)에 대한 자신만의 향긋한 추억과 내일(미래)에 대한 불안정한 미지 속에 파묻혀 오늘(현실) 자신이 서서히 죽어가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렇게 서서히 망가지는 사이 스스로 만든 덫에 자신이 걸려 아파하며, 그것을 잠시 빠져 나왔다고 기뻐하는 혼자만의 놀음의 진수를 보여 준다.
이렇게 스스로 망가지고 죽어 가는 것도 모른 채 그 행위를 이어 가는 그런 것이 바로 어리석음의 최상인 것이다.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은 조건이나 환경이나 현재의 상황이 아니라 바로 나인 것이다. 그럼 나를 힘들지 하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마음을 알면 바로 부처요,
한 생각 놓으면 그 자리가 바로 불국토인 것이다.

다시 말해 너무 깊이 생각하지 말고 그 낱말의 뜻에 얽매여 본질을 간과하지 말라는 것이 핵심이다.
마음이란 생각 이전의 본래 자리이다.
왜 마음에다 이런저런 생각을 만들어 못살게 구는가 말이다.
게다가 남이 한 것도 아닌 스스로 만들어낸 생각에 왜 스스로 고통을 당해야 하는 것인가.
수처작주(隨處作主) 입처개진(入處皆眞)이라 했다. 그 어느 곳, 어느 때에 머물지라도 머무는 곳마다 주인이 되라.
지금 있는 그곳이 바로 진리, 즉 깨달음의 세계이니라. 부처님법은 굳이 애써 힘 쓸 필요가 없는 것이다.
다만 평소에 아무 탈 없이 똥 싸고 오줌 누며, 옷 입고 밥 먹으며, 피곤하면 잠자면 그 뿐인 것이다.
그러면 어리석은 사람은 이렇게 말한 나를 비웃는다.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은 알 것이다. 옛 성현들이 말씀하시길 “밖을 향해 공부하지 말라.
그것은 어리석은 자들의 짓일 뿐이다.
그러니 그대의 수처작주가 그대로 입처개진이다. 경계를 맞이하여 회피하려 하지 말라.” 하였다.
소승 혜운이 다시 풀이하면 수처(隨處)란 조건과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환경이고 내가 살아가는 바로 현실의 삶인 것이며, 작주(作主)란 인생의 주인공이 되어 남이 이끄는 대로 사는 피상적 동물이 아니라 주체적으로 살아가라는 뜻이다.
언제 어디서 어떤 일 속에서도 늘 진실하고 주체적이며 창의적인 주인공으로 살아가면 그 자리가 최고 행복한 세계라는 가르침이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늘 변화의 흐름 위에서 흘러간다. 변화하는 인생의 흐름 속에서 결단코 분명한 것은 “나는 나에게서 달아날 수 없다”는 사실이다.
고통을 받는 주체도, 즐거움을 받는 주인도 바로 “나”이다. 아울러 고통과 즐거움을 만들어 내는 주인도 다름 아닌 “나”이다.
그러므로 법구경에서는 “자기야 말로 가장 사랑스런 존재”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부처님은 자신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사랑하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세상을 사는 대부분 중생들은 아집과 교만, 독선으로 나를 포장하고 내세우며 자존심을 강조한다.
하지만 인생의 참 주인공은 이러한 아집이 없으며 편견과 오만에서 벗어나 있는 것이다.
또한 우리들은 다른 사람을 보며 스스로가 나약하다는 열등감도 버려야 하는 것이 수처작주의 가르침입니다.
열등감이란 것은 한 가지 부족하다는 생각이 아니라 다양한 감정을 불러 모읍니다.
그 중 대표적인 감정이 부러워하거나 비굴해지는 마음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저 사람은 저렇게 좋은 환경과 깨끗한 일을 해서 좋겠다.
내게도 저런 기회가 오면 마음껏 실력 발휘를 할 수 있을 텐데… 나는 왜 이리 운이 없을까.
나는 뭐하나 되는 일이 없는 것일까? 이런 생각을 하신 분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처지를 수긍하고 노력하기 보단 부러워하며 비굴의 가면 뒤에 숨는 것이 좋을까요.
부러워한들 그 사람과 같은 자리에 오르지도 못할 뿐 아니라 비굴해진다고 해도 누군가가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 주지도 않는 것이 현실입니다.
오히려 열등감만이 점점 강해질 뿐입니다.
긴 가지에 달린 열매는 햇빛을 많이 쏘여 달고 튼실히 익어가지만 짧은 가지에 달린 열매는 볕이 덜 들어 더디게 익어갑니다.
그러나 가지는 이것을 결코 의식하지 않습니다.
짧은 가지는 긴가지를 부러워하지도 않으며 스스로 비굴해지지도 않습니다.
스스로 그곳에 있음을 자연스레 받아들이고 그곳에서 열매의 결실을 맺어 보이는 것입니다.
여기서 나를 대입해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있는 그 장소에서, 그 상황 속에서 최선을 다한다.
볕이 덜 드는 장소일지라도, 하찮다는 생각이 드는 일이 주어질지라도 자신의 온힘을 다하는 것이 바로 수처작주의 가르침이 아닐까 단언해 봅니다.
  우리들이 이야기하는 선지식이란 “마음에 한 물건도 없는 사람”을 말합니다.
나는 반드시 극락왕생해야겠다, 성불해야겠다, 도를 찾아야겠다는 생각도 망상이라 할 수 있다.
왜 그런가 하면 “깨달았다”라고 하는 것은 생각이 끊어 졌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마음자리는 사량이나 분별을 떠난 자리인데 우리는 여전히 사량, 분별 속에서 마음을 알아야겠다, 생사를 초월 해야겠다 등등 생각을 통해서 마음을 알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게 뭘고? 천만의 말씀이다.
그저 마음이 뭘까 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허둥대는 것일 뿐이다.
인간의 욕심은 채우면 채울수록 모자라게 느끼는 것이고,
완전하게 채웠다고 하는 순간 결핍이 일어난다. 그래서 비움이 결국에는 답인 것이다. 아무 생각도 없을 때라야 바로 보입니다. 보는 순간에 거기에 의미나 뜻을 생각하면 눈을 가리게 됩니다.
무심의 눈엔 산은 산, 물은 물, 건물은 건물입니다. 희노애락이라는 어떠한 가공을 거치지 않은 즉물의 경계에서 실상이 보이는 것이다.
즉 주변의 일체와 내가 일치가 되는 것입니다. 때가 잔뜩 낀 거울로 사물을 보면 그 사물이 왜곡되어 보이거나 아예 형체 자체가 보이지 않습니다.
거울에 묻어있던 때가 없어졌을 때, 마음에서 생각이란 그림자를 걷어냈을 때, 비로소 나와 하나가 되고 거기엔 어떤 괴로움도 끼어들지 못하는 것입니다.
집에 두고 온 가족생각, 비어가는 내 통장, 내일의 할 일, 원수같은 회사 선배 등등 온갖 잡념들이 시선을 가려버린다.
망상에 망상이 거듭되면서 나는 그저 눈 뜬 장님이 되어 버린다.
망상이 일어나면 그저 가만 놔두십시오.
망상을 없애려고 마음먹으면 망상이란 놈은 더 강력해집니다.
생각이 곧 망상이고 망상은 망상을 먹고 살기 때문이다.
결국 망상에게 다른 어떤 망상도 제공하지 않고 그대로 방치하면 굶주린 망상은 자연히 목숨을 잃는다.
망상은 물에 비친 그림자와 같이 공한 것입니다. 따라서 형체가 있든 형체가 없든 비워봅시다. 바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바로 지금 이 자리의 내 마음가짐과 마음 씀은 내 인생의 씨앗이고 열매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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