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 해체 이후 다른 동구권 나라들도 마찬가지였지만, 러시아는 민주주의가 정착되지 못했다. 민주주의 정치 체제가 부재한 가운데 구소련의 국가 자산을 불법적으로 차지한 신흥 재벌 올리가르히(oligarch)들이 재빨리 권력을 장악했고, 이들이 자신의 부와 생명을 지키고, 민주주의를 관리, 통제하기 위해서 찾아낸 새 지도자가 바로 블라디미르 푸틴이었다. 
소비에트 연방이 해체되고,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역사의 종언을 고하며 자유민주주의를 인류사회 최후의 이데올로기라고 단정했을 때만 해도 푸틴으로 상징되는 권위주의가 민주주의를 관리한다고 의심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30년이 채 지나지 않은 오늘, 경제성장은 둔화됐고 불평등이 확산됐으며 세계화의 부작용이 시민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오늘날처럼 정교한 가짜 뉴스가 사방에서 몰아치며 진실을 가리고, 현재의 불평등과 미래의 불확실성이 엄습하면서, 우리는 민주주의로 가장한 권위주의에 이끌리기 쉬워졌다. 
 예일대학교 사학과 교수이자 비엔나 인문학 연구소 종신 연구원인 저자는 필연성에서 영원성으로 이어지는 이 생각 없는 여행을 멈추기 위해서는 가짜 민주주의로 향하는 발걸음을 멈추고, 불확실한 미래를 우리의 것으로 만들어가기를 제안한다.
“민주주의 정치 체제가 부재한 가운데 구소련의 국가 자산을 불법적으로 차지한 신흥 재벌 ‘올리가르히’들은 재빨리 권력을 장악했다. 이들이 자신의 부와 생명을 지키고, 민주주의를 관리, 통제하기 위해서 찾아낸 새 지도자가 블라디미르 푸틴이다. 푸틴이 소수 부자의 지배를 정당화하는 데 활용할 수 있는 파시즘 이념을 찾아내면서 러시아에 권위주의가 복귀했다. 러시아와 주변부에서 푸틴의 지배가 공고화되면서 2010년에는 권위주의가 동구에서 서구로 확산됐다.”
권위주의의 이같은 대륙간 이동에 무엇보다 위력을 발휘한 것은 더욱더 정교해진 가짜 뉴스와 인터넷 리서치 에이전시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러시아의 사이버전 전문 중추부의 인터넷 여론 조작 방식이었다. 이 업체가 만들어낸 트위터봇, 인터넷트롤이 브렉시트를 성공시키는 것을 확인하자 러시아는 민주주의의 심장을 겨누기 위해 미국으로 고개를 돌린다. 
미국인의 관점에서 볼 때, 트럼프타워는 뉴욕시 5번가에 있는 화려한 빌딩이다. 반면 러시아인의 관점에서 보면 국제적 범죄를 유혹하는 장소다. 러시아 마피아들은 1990년대에 트럼프타워에 있는 아파트를 사고팔면서 돈을 세탁하기 시작했다. 트럼프타워에는 미 연방수사국이 오랫동안 추적한 러시아의 가장 악명 높은 청부 살인업자가 살았다.
1999년과 2001년 사이 맨해튼 동쪽 유엔 본부 근처에 세워진 트럼프월드타워는 호화 아파트의 3분의 1을 구소련 출신 사람들이나 단체가 사들였다. 사우스플로리다에 있는 트럼프 부동산 매물 700개를 매입한 것은 페이퍼 컴퍼니들이었다. 2004년 파산한 트럼프에게 유일하게 대출을 해 준 은행은 도이체방크였는데, 이는 2011년부터 2015년까지 러시아 고객들을 위해 100억 달러 정도를 세탁해 준 곳이었다. 공화당 대통령 후보 토론회를 코앞에 둔 2015년 10월, 트럼프는 러시아인들이 모스크바에 고층 빌딩을 세우고 자기 이름을 붙이게 하는 동의서에 서명했다. 그러고는 트위터에 “푸틴은 도널드 트럼프를 사랑한다”고 선언했다. 
“도널드 트럼프가 미국인의 친구가 된 것은 리얼리티쇼 〈어프렌티스〉에서 누구든 자기 마음대로 채용하고 해고할 수 있는 거물 역할을 맡으면서다. 2억 1,400만 달러 이상 벌어들인 이 쇼의 클라이맥스는 그가 “당신 해고야(You are Fired)”라고 말하며, 노동자에게 고통을 가하는 순간이다. 트럼프가 대통령에 출마했을 때 그 밑바탕에는 세상이 실제로 그러하다는 전제가 깔려 있었다. 법을 무시하고, 제도를 경멸하며, 공감이 결여된, 가공의 부를 가진 가공의 인물이 고통을 유발하는 식으로 사람들을 다스릴 수 있다는 전제가 그것이다. 트럼프는 수년 동안 텔레비전에서 가공의 인물을 연기한 덕분에 토론에서 공화당 경쟁자들을 압도할 수 있었다.”
러시아의 사이버전이 미국 대선에서 실제로 얼마나 파괴적인 작용을 했는지를 제대로 평가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트럼프 당선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와 유럽 연합에서 실험한 사이버전을 얼마나 정밀하게 발전시켰는지, 노련하게 다루게 되었는지를 확실하게 보여주는 사례다. 무엇보다 소셜미디어 시대에 민주주의가 얼마나 쉽게 교란될 수 있는지, 또 얼마나 쉽게 무너질 수 있는지를 생생하게 드러내 보인다.
유강은 옮김. 부키, 456쪽, 2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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