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선당 혜운 스님
운선당 혜운 스님

세상 사람들은 한 결 같이 복된 삶을 바라고 있습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복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있기에, 따라서 어떻게 해야 복된 삶을 살아갈 수 있는지를 모르고 지내고 있는 것이 우리들의 실정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무조건 물질적인 풍요만을 바라고, 병 없이 오래 살기만 바라며, 사회적으로 나의 명예가 커지기를 바라는 것이 큰 복이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복은 내 자신이 아닌 부처님이나 예수님, 또는 다른 어떤 신들이 주시는 것으로 생각하거나, 사주팔자와 같은 운명에 의해서 복이 오는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불자이며, 불자란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지하여 새사람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 부처님께서는 우리에게 복에 대하여 어떻게 가르쳐 주셨습니까?
그것은 인과응보(因果應報)요, 자업자득(自業自得)이요, 자작자수(自作自受)라고 하였습니다.
다시 말해 자기가 짓고 자기가 받는다는 지극히 간단명료한 말씀입니다.
인과경(因果經)에 욕지전생사 금생수자시(欲知前生事 今生受者是)
  욕지미래사 금생작자시(欲知未來事 今生作者是) 라고 하였습니다.
너의 전생의 일이 궁금하거든 지금 네가 받고 있는 것을 보아라,
너의 미래가 궁금하거든 현재 네가 하고 있는 일을 보아라 하는 말씀입니다. 
우리에겐 나 이외 누군가에 의해 결정지어진 운명이란 없는 것이요, 오직 자신이 업을 지음으로 그것이 원인이 된 결과로 나타난 운명적 현실만이 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 것도, 나를 괴로움의 세계에서 헤매게 하는 것도 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에게 괴로움이 닥쳤을 때 결코 남을 원망하거나 탓할 수 없는 것이며, 남들이 복을 누리며 사는 것을 보고 부러워하거나 불공평하다고 한탄할 일도 아닌 것입니다.
나에게 복스러운 일이 나타나게 되면 그것은 지난날의 나의 착한 업의 결과라고 감사히 받고, 더욱더 착한 업을 지어나가겠다고 다짐하는 것이 맞는 것이지 자기가 특별히 잘난 것처럼 생각하여 교만에 빠져서는 안 되는 것이며, 그 반대로 어려운 현실에 부딪히게 된다면 지난날의 나의 죄업에 대하여 부끄럽게 생각을 하고, 그 괴로움을 달게 받으며, 마음 속 깊이 참회해서 이제부터라도 착한 업을 짓기를 다짐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분명한 부처님 가르침이 우리에게 주어졌는데도 어리석은 분들은 다른 누가 내 밖에 있어 나를 행복하게도 하고 불행하게도 한다고 믿는 기복신앙에 빠져있는 것을 보게 되니 참으로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여러분들은 부처님께 예경드리고, 공양올리고, 부처님의 거룩한 진리의 말씀을 듣고, 그 가르침으로 자기를 비추어 생각하여 자기의 일상생활을 바꿔 가는 노력을 하는 것이 바로 지혜롭게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입니다.
그런데 어떤 분들은 부처님 법문 듣는 것을 뒤로 미루고, 복을 달라고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드리는 것을 흔히 보게 되는데 이것은 부처님의 진면목을 못 보는 분들입니다.
모두가 아시겠지만 부처님께서는 대지혜, 즉 이 세상 모든 생명체가 모두 하나의 생명이라는 것이 밝혀진 큰 지혜입니다.
부처님에게는 남이 없으며 모두가 나입니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의 괴로움은 바로 당신의 괴로움인 것이며,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괴로움으로 울부짖는 중생들을 자비 원력으로 빠짐없이 거두어 주시는 것이며 이것을 동체대비(同體大悲)라고 합니다.
즉, 한 생명을 살고 있는 사람들의 괴로움이니까 이것을 당신 자신의 괴로움으로 알고 자비로 보살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괴로워할 때 부처님께서는 우리의 요구가 있어야 비로소 우리를 보살피는 것이 아니라, 우리 쪽에서 요구하거나 요구하지 않거나에 관계없이 그 따사로운 손길로 우리를 어루만져 주고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이끌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부처님의 이러한 대자비의 원력을 미처 알지 못하는 이들은 부처님이 멀리 있는 줄 알고 또는 부처님께서 나의 괴로움을 모르는 줄 알고 또는 나의 괴로움에 대해서 무관심한 줄 알고 무턱대고 복을 달라고 빌기만 합니다.
우리는 모두 행복하게 살아야 합니다.
모두 건강하게 오래 살며, 사회적인 명예도 얻고, 물질적으로도 풍요로우며, 가정이 화목하고, 이웃과는 따사로운 인정을 나누며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그렇게 살 수 있는가 하면 인과응보의 법칙에 의해 살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결과가 나타날 수 있는 원인, 즉 복을 심으면 됩니다.
그것은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 거기에 맞게 나의 일상생활을 바꾸어 가는 것입니다.
내가 바뀔 때 비로소 운명이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그러한 방법으로 여섯 가지의 바라밀법을 일러 주셨습니다.
바라밀이란 “저 언덕에 이른다” 라는 말인데 그것은 괴로움이 가득 차 있는 이 언덕을 떠나서 완전무결한 괴로움이 없는 정복(淨福)이 가득 찬 저 언덕에 이른다는 말입니다.
육바라밀은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지혜바라밀로 모두 다 중요한 말씀이지만 오늘은 첫째 덕목인 보시바라밀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보시바라밀이라고 하는 것은 나에게 있는 것을 아낌없이 주변의 모든 이에게 주어 그들의 삶을 행복하게 해 주라는 것으로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는 재물을 주는 것이고, 둘째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주는 것이며,
셋째는 무외시(無畏施)라고 하여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일체의 두려움을 없애 주는 것입니다.
앞에서 보았지만 부처님께서 지혜를 완성하셔서 깨달음을 얻고 보니까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모두 한 생명을 살고 있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어두운 눈으로 보면 이 세상은 온통 대립의 세계로 보입니다.
이 무서운 대립세계에서 각기 생존경쟁을 전개하며 살고 있는 것이 우리의 중생세계입니다.
이런 대립세계에서 살아남으려면 남들이야 어떻든 나만은 생존에 필요한 모든 것들을 충분히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심지어는 남이 가지고 있는 것이라도 내가 빼앗아 와야 한다고 믿고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그런 생각을 버리고 나에게 있는 것을 남들에게 주라고 가르치십니다.
그것은 부처님께서 보신 세계, 다시 말하면 모두가 한 생명으로 살고 있는 세계가 참으로 있는 세계이지, 우리 중생들이 보고 있는 세계가 참으로 있는 세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 중생들이 보듯이 그렇게 겹겹으로 쌓인 울타리가 가득한 세계는 참 세계가 아닙니다.
생존 경쟁의 세계는 당연히 부정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보신 세계와 우리가 보고 있는 세계는 다른 세계가 아니라 한 세계를 두고 하는 말로, 똑같은 하나의 세계를 우리는 생존경쟁의 세계라 보는데,
부처님께서는 한 생명의 세계라고 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부처님과 보고 있는 대상은 같은데 보는 내용은 정반대가 되니 모순에 빠지게 됩니다.
이럴 때 그 모순을 이기려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우리가 부처님과 다르게 세상을 보는 것은 우리의 눈이 어두워서 그러한 것이니,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세계를 보는 눈을 버리고 부처님께서 보신 세계만을 진실이라 믿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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