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형사의 활약상을 그린 ‘수사반장’, 1948년 정부수립 이후부터 1960년 4·19혁명까지의 시대를 기록한 ‘제1공화국’과 ‘제2공화국’, ‘제3공화국’ 시리즈, 당대의 땅 투기 문제를 다룬 ‘땅’ 등1980~1990년대 사람들의 공감을 얻으며 TV 앞에 모이게 했던화제작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스타PD 1세대’ 고석만 PD는 최근 출간한 ‘나는 드라마로 시대를 기록했다’를 통해 “비망(備忘)해야 비망(非亡)한다”고 밝혔다. 잊지 않으려 애써야(備忘) 망하지 않는다(非亡)는 의미다.
고 PD는 민주주의가 억압당하던 시대를 드라마로 기록하고 사회와의 소통을 이어왔다는 평을 받는다.
그는 TV도 통제받던 군사독재정권 시절, 공영방송 MBC의 PD로 활동했는데, 정권의 나팔수 역할을 강요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공영방송의 책무는 민주주의를 강화하는 것이다’라는 독일 헌법재판소의 판결문을 가슴에 새기고 드라마를 ‘사회의 민낯을 비추는 거울’, ‘시대를 고발하고 깨우는 도구’로 사용하고자 했다.
그것이 고 PD 스스로 당대 사회를 위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고, 이 결과 수많은 화제의 작품을 생산할 수 있었다.
책은 고 PD의 철학과 이를 토대로 그가 벌인 작품활동, 성장기 및 일대기, 현대를 돌아보게 만들고 다음 세대에 바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1부 수난에서는 고 PD의 활동 중 이유를 알 수 없는 제작 중단, 조기종영, 기획무산, 대본까지 사전 검열을 받았던 사례 등 숱한 억압과 중단의 역사를 다뤘다.
드라마 ‘땅’은 땅 투기를 중심으로 정부를 비판하며 한국 사회 발전의 어두운 면을 조명했다. 그러자 첫 회가 방영 직후 청와대 비상대책회의가 소집됐다.좋지 못한 내용을 방송했으니 사과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5·16 쿠데타와 박정희 대통령이 등장하자 드라마는 15회만에 조기종영됐다.
최초의 정치드라마 ‘제1공화국’을 만들면서는 북한 정치의 시작을 소재로 삼았다는 이유로 안기부(국가안전기획부)에도 끌려갔다.
한국경제의 전환기인 1970년대를 살아가는 청년이 대재벌로 성장하는 과정을 그린 ‘야망의 25시’는 방송 6회만에 일시 중지됐다. 방송사측은 더 좋은 작품 제작을 위해서라고 밝혔지만 기업의 압력 때문이라는 게 중론이었다.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며 인기리에 방영됐지만 22회만에 조기종영했다. 정경유착의 어두운 힘이 작용했다고 고 PD는 회상했다.
2부 ‘피디로 가는 길’에서는 저자가 드라마 PD로 성장하기까지의 과정이 담겼다.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방황했던 어린 시절, 당시 영화를 섭렵하며 ‘헐리웃 키즈’를 꿈꾸고 영상에 뜻을 두기 시작한 대학생 시절, MBC 입사 후 조연출, 연출 등을 거치며 스타 PD에 이르기까지를 담았다.
3부 ‘특집’은 고 PD가 장편 사이사이 연출했던 특집 드라마에 대한 이야기가 소개된다.
시 한편으로 구상했던 작품, 컴퓨터 그래픽이 없어 실제 갈매기를 데리고 갈매기 주연의 드라마를 만든 과정, 중국과의 정식 수교 이전임에도 백범 김구의 일생을 담기 위해 현지 촬영을 진행했던 이야기 등도 다뤘다.
4부 ‘능선’에서는 그의 MBC 후반기와 프리랜서 드라마 PD 시절과  EBS 사장, EBS국제다큐영화제 기획 등을 맡았던 때, 여수엑스포 총감독 시절을 그린다. EBS 사장이었던 때에는 수능방송, ‘스페이스 공감’ 등 현재의 EBS가 있도록 성장과 변화를 이끈 바 있다. 현재 2020 두바이엑스포 한국관 총괄 자문위원장으로서의 활동 내용도 다루고 있다.
고 PD는 이 책이 삶의 경주를 거의 다 마친 사람의 회고록이 아니라 잊힘을 경계하며 다음을 준비하는 데 쓰이는 비망록으로 읽히길 바란다고 전하며 이야기를 마무리한다.
고 PD의 작품을 기억하는 이들은 작품 속 숨겨진 비하인드 스토리와 당시를 떠올리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단순히 고 PD의 과거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에 그치지 않고 현대 방송콘텐츠의 실정과 앞으로의 방향성에 대한 제언까지 담아냈다.
고석만. 396쪽, 1만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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