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노라의 그림이 들려주는 이야기
안노라의 그림이 들려주는 이야기
  • 경기매일
  • 승인 2019.12.09 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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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52 _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
출처_ 구글
안노라 ▲‘그림으로 만나는 서양사’인문학 강사▲‘벗에게 가는 길’인문학 공간 대표
안노라 ▲‘그림으로 만나는 서양사’인문학 강사▲‘벗에게 가는 길’인문학 공간 대표

서성이다라고 하는 게 맞는 표현일 것 같습니다. 마주보지도 못하고 도망가지도 못하고 주변을 맴돌고 있는 상태이지요. 시선은 그림에 붙잡혀 있는데 몸은 자꾸 뒤로 물러나려 합니다. 그림이 주는 강렬한 에너지에 소심한 심장이 그만 바닥으로 떨어집니다. 눈앞의 대상을 보고 있는 것이지, 대상이 주는 느낌을 보고 있는 것인지 지각이 휘청거리지요. “예술은 아름다운 거짓말의 형식으로 말해지는 정확한 진실이다.”는 문장이 뜨거운 체온을 획득합니다. 바지선을 온 몸으로 끌고 있는 인부들은 그의 자화상이었을까요? 신분과 특권의 벽을 넘지 못하고 거대한 동토(凍土)에 붙잡혀 고문당하고 있는 러시아의 민중을 일리아 레핀은 외면하지 못했습니다. 그의 뛰어난 재능은 민족에게 바쳐진 위대한 제물이었지요.

 

1863, 러시아 최고의 미술학교 상트페테르부르크 미술 아카데미에서 14명의 학생들이 졸업을 앞두고 자퇴합니다. ‘14인의 반란자라고 하지요. 2년 전인, 1861년 당시 황제였던 알렉산드르 2세는 낙후된 러시아에 서유럽의 근대 문명을 이식하고자 농노해방령을 선포합니다. 학교에서 졸업 작품의 주제를 농노해방으로 제시한 것은 황제에 대한 칭송이 목적이었습니다. 학생들은 졸업 작품에 대한 자유로운 주제를 외치며 반대했고 자퇴했습니다. 그리고 이반 크람스코이를 중심으로 이동파(Peredvizhniki)를 만듭니다. 모든 러시아의 민중들이 예술작품을 감상할 수 있도록 마을과 마을로 이동하며 전시회를 연다는 의미였습니다. 시대를 흔든 브나르도(민중 속으로)운동의 일환이었지요.

 

당시 러시아의 미술계는 17세기 말, 표트르 대제가 진두지휘했던 서유럽의 귀족적이며 서구화된 예술에 갇혀 있었습니다. 이동파는 서구라는 포장지를 벗기고 러시아라는 알맹이를 건져냅니다. 그들이 구현했던 미술은 이후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모태가 되었지요. 이동파의 일원이었으며, 이반 크람스코이에게 배웠던 일리아 레핀(llya E. Repin, 1844~1930)1870년 러시아의 젖줄인 볼가 강에서 자신들의 어깨로 배를 끌고 있는 한 무리를 보게 됩니다. 그는 3년여의 작업 끝에 <볼가 강의 배를 끄는 사람들>이라는 작품을 완성합니다. 중언부언 없이 간결하고 선명한 그의 언어가 빚어낸 고결한 그림을 읽어 봅시다.

 

하늘과 바다는 아득하군요. 수평선 실금 위로 증기를 뿜는 배가 이제 막 사라지려고 합니다. 파도도 일지 않는 고요한 바닷가에 십여 명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낡고 헤진 옷차림과 햇볕에 탄 검은 얼굴, 산발한 머리, 모두 가죽 끈으로 어깨를 감고 돛을 내린 커다란 배를 끌고 있습니다. 두 손을 늘어뜨리고 힘겹고 몸을 앞으로 구부린 사내는 이 일에 익숙한 듯합니다. 파문당한 사제 카닌입니다. 무리를 이끌고 있는 그의 표정엔 희노애락이 담겨있지 않습니다. 그 옆의 산발한 인부는 이마의 굵고 깊은 주름으로 이 억울한 상황에 대해 뭐라고 말해보라는 표정입니다. 카닌의 왼쪽 남자의 눈은 분노로 이글거립니다. 저항하는 들짐승의 눈입니다. 그들 뒤로는 무심한 듯 파이프를 물고 있는 남자와 포기한 듯 고개를 숙인 인부들의 모습이 이어집니다. 오로지 어린 한 명의 어린 소년만이 고개를 들어 먼 곳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소년이 바라본 곳은 그의 어깨가 감당하고 있는 배의 무게를 내려놓을 수 있는 곳일까요? 배의 무게가 삶의 무게보다 가벼울까요? 태양은 아직 소년의 살을 검게 태우지 못했습니다. 소년의 시간은 아직은 볕에 그을리지 않는 미지의 시간입니다. 일리아 레핀은 러시아의 미래가 소년이 바라보는 곳 어디쯤에 있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밧줄을 끌며 앞으로 나아가는 민중의 한 걸음 한 걸음이 러시아라는 배를 끄는 역사의 원동력이라고 말하고 싶었던 건지도 모릅니다. 그는 남은 말들을 마치기 위해 그의 화구를 챙겨들고 귀족의 거실이 아닌 남루한 민중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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