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평론가 한정규
문학평론가 한정규

광주광역시 광산구 광산동 백우산자락 울창한 송림 그 속에 광주광역시 기념물 제9호. 조선시대 성리학자 고봉 기대승을 봉향하는 월봉서원이 있다. 고봉 기대승은 1527년 조선 중종 22년 11월 18일 광주광역시 임곡의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나 독학으로 32세에 문과에 장원급제를 한 보기 드문 인물이다.
빙월당은 고봉 기대승을 비롯한 조선시대 학자를 모신 월봉서원 강당이다. 빙월이라는 이름은 정조가 기대승의 고결한 학덕을 ‘빙심설월氷心雪月’에 비유해 하사했다고 전해진다.
월봉서원은 고봉기대승을 주벽으로 김장생 김집 박상 박순 등 조선시대 학자와 명신 등 많은 인재를 배양했다.
고봉은 성리학자로서 퇴계 이황선생과도 두터운 친분관계였으며 논사록과 주자문록 등 다수 문집을 남기는 등 성리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 뿐만 아니라 퇴계 이황선생과 고봉 기대승선생간에 8년간 주고받은 것을 기록한 ‘사칠이기론’이 있다.
 고봉은 퇴계선생과 8년 동안 120여 통의 서신을 주고받으며 때로는 만나서 밤을 새우면서 학문을 논하기도 했다 한다.
조선시대 성리학자로서는 최고인 퇴계선생과 사단칠정논쟁을 할 수 있었다는 것, 게다가 고봉보다는 스물여섯 살이나 많은 대 선배 퇴계와 어께를 나란히 할 수 있었다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고봉선생의 학문이 대단했음을 엿 볼 수 있다.
월봉서원은 1578년 선조 11년에 세웠다가 임진왜란 때 피해를 입고 산월동에 다시 세웠는데 대원군이 시행한 서원철폐 때 철거됐다. 그러던 것을 1941년 다시 현 위치에 빙월당을 짓고 1978년부터 사당과 장판각 내외 삼문을 건립 1981년 준공 오늘에 이르렀다.
백우산 자락의 울창한 송림으로 쾌적한 환경 속에 동재 명성재와 서재 존성재 그리고 강당 충유당이 위엄을 보인다.
빙월당의 장판각에는 고봉집 논사록 왕복서 이기왕복서 등 목판 474매가 보존돼 있다. 월봉서원 위쪽에는 숭덕사가 있다. 뿐만 아니라 마을에는 고봉학술원도 있다.
빙월당엔 고봉 기대승선생과 퇴계 이황선생과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두 사람이 학문에 대해 많은 논쟁을 하면서 서로가 서로를 깊이 신뢰하게 되고 존경심을 갖게 됐다.
두 사람 간 믿음과 존경심을 도처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그 중에서도 덧보인 것이 고봉선생이 서울에서 퇴계선생을 전송하며 읊었다는 시 ‘한강도 도도히 쉼 없이 흐르는데 선생의 가심을 어찌 말하랴. 모랫가 머뭇거리며 돛 당기는 곳에서 이별의 슬픔 헤아릴 수도 없네.’다.
또 한 번은 퇴계와 고봉이 만났다 헤어진 뒤 남쪽으로 떠날 고봉에게 이렇게 편지를 썼다. ‘어제는 뵙고 싶은 바람을 이룰 수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요? 감사하고 부끄러운 마음이 아울러 깊어져 비할 때가 없습니다. 내일 남쪽으로 가신다니 추위와 먼 길에 먼저 조심하십시오. 덕을 높이고 생각을 깊게 하며 학업을 추구하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이황이 삼가 말씀드렸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후에 퇴계선생은 고봉선생에게 자기 아버지 찬성공의 묘갈명을 써 주기를 부탁하고 고봉의 나이 44세 때 퇴계선생이 죽자 고봉은 실성한 사람처럼 통곡하면서 그의 묘 앞 묘갈명을 써서 바쳤다. 고봉은 당대의 최고 성리학자인 퇴계선생이 내 세울 만큼 학문이 특출한 호남이 배출한 성리학 자였다. 광주는 그런 기대승선생의 월봉서원과 빙월당이 숨 쉬고 있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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