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평론가 한정규
문학평론가 한정규

성품이 강직하고 시비를 가림에 타협할 줄 몰라 자주 유배를 당하는 등 파란만장한 세상을 살았던   고산 윤선도 녹우당이 완도 보길도에 있다. 사적 제368호 보길도윤선도유적으로 지정됐다가 2008년 1월 8일 보길도윤선도원림으로 명칭을 변경해 명승 제34호로 재 지정됐다.
윤선도는 보길도는 완도에서 남쪽으로 32여㎞ 떨어진 외딴섬이다. 보길도에서 제일 높다는 산봉우리인 격자봉아래 계곡을 부용동(芙蓉洞)이라 명명 그 일대에 정자를 짓고 연못을 만들어 속세를 떠나 아무것도 매이지 않고 자유로우며 편하게 자연을 벗 삼아 살았다.
고산 윤선도는 조선시대 정철 박인로와 함께 3대 시가인 중 한사람이다. 윤선도는 여덟 살에 큰아버지 집으로 양자 열한 살에 절로 들어가 공부 스물여섯 살에 진사시에 급제 광해군 8년에 이이첨의 난정과 유희분 박승종의 죄에 대해 상소를 올렸다가 경원 등지에서 유배생활을 했다.
유배생활 중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 풀려 낙향 해남 고양에서 살았다. 고향에서 산 5년째 되던 1628년에 봉림대군과 인평대군의 사부가 돼 인조의 신임을 받고 호조좌랑, 세자시강원문학 등 주요 요직을 맡았다.
그렇게 되자 노론의 질시로 1635년 낙향했다. 이듬해 병자호란이 일어나 나라가 어수선해지자 조용히 살기를 결심하고 배를 타고 제주도를 향해 가던 중 보길도 경관을 보고 너무 좋아 머물게 된 곳이 격자봉아래 계곡 부용동이다.
1638년 인조가 고산 윤선도를 찾았다. 고산은 응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영덕으로 유배를 가게 됐다. 이듬해에 풀려 보길도로 가서 정자를 짓고 시를 쓰고 가무를 즐기며 살았다.
효종이 즉위한 후에도 몇 차례 부름이 있었으나 사양하고 벼슬을 하지 않았다. 오직 정자를 증축하는 등 자연과 함께 자유로운 생활을 즐기며 제자들을 가르치는 일에 만 몰두했다.
고산 윤선도는 효종이 승하하자 송시열 등 노론파에 맞서 상소를 하다 삼수로 유배를 당했다가 그의 나이 81세에 유배에 풀려 세상을 떴다.
고산 윤선도는 국문학사상 최고로 일컬어지는 75수의 시조와 단가를 담은 하별집을 남겼으며 정조가 지시해 펴낸 고산유고가 있다. 하별집에는 어부사시사 40편, 산중신곡 18편, 몽천요 5편, 산중속신곡 2편, 우후요 1편, 기타 6편 등이 실려 있다.
어부사시사는 고산의 대표작으로 효종 때 부용동에서 은거생활 중에 쓴 것으로 봄과 여름 가을 겨울을 소재로 자연과 함께한 작품이다.    
보길도 녹우당 입구에 세연정과 연못을 축조하고 물과 바위 대(臺)와 소나무·대나무 등을 이용한 정원으로 부용동원림 중에 잘 보존된 유적이다.
세연정에서 부용리 쪽으로 20여분 가다보면 낙서재 건너편 산비탈에 동천석실이 있다. 그곳은 1 천 여 평 공간으로 석문, 석담, 석천, 석폭, 석대(石臺), 희황교 등 유적이 남아 있다. 석문 안 반석에는 다도(茶道)를 즐기던 흔적이 있고 그 주위에 건물터가 있다.
부용리 일대에 낙서재와 무민당 곡수당을 짓고 세상의 명리를 떠나 자유스러운 생활을 했다. 그곳에는 낭음계, 승룡대, 하한대, 혁희대, 독등대, 상춘대, 언선대, 오운대, 조산, 미산, 석전 등이 있다.
고산 윤선도가 지은 지명들이다. 윤선도는 1637년부터 85세로 죽을 때까지 일곱 차례나 보길도에 왔다 갔다 하면서 13년을 머물며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 40수와 32편의 한시를 남긴 희대의 대쪽 같은 선비이자 문장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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