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돼지열병(ASF)이 사육 돼지에서 발생하지 않은 지 석 달에 가까운 시간이 흐르고 있지만, 방역 당국은 기르던 돼지를 전량 살처분한 농가들이 언제부터 돼지를 다시 들일 수 있을지에 대한 명확한 기준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집돼지가 아닌 야생 멧돼지에서의 발생이 지속되고 있어 자칫 바이러스가 확산될 가능성을 우려해서인데, 재입식 절차에 관한 기본적인 로드맵조차 내놓지 못하고 있는 데 대해 축산업계의 반발이 거세다.
9일 농림축산식품부에 따르면 당초 농식품부는 지난달 중 재입식 전 위험성 평가 기준을 발표키로 했었지만, 이를 미뤘다. 평가에 통과하지 못한 농가가 폐업 신고를 한 경우 지원금 지급 근거를 명시한 ‘가축전염병예방법’ 개정안이 국회 법제사법위원회를 통과하지 못하고 계류됐기 때문이다.
예방적 살처분 조치의 기준을 가축뿐 아니라 전염병의 매개체까지 넓히는 개정안 일부 내용에 한돈협회가 반대하고 나섰다. 전염병 매개체는 야생 멧돼지를 포함하는 것으로, 개정안에 따르면 멧돼지에서 바이러스가 검출되는 경우에도 인근 농가의 돼지를 살처분할 수 있게 했다는 점을 문제 삼았다. 한돈협회는 당시 발표한 성명에서 “한돈 산업을 붕괴시킬 수 있는 개악”이라며 개정안의 철회 또는 수정을 요구했다.
계류 결정이 내려진 지 한 달여 기간 정부는 생산자 단체와의 이견을 좁혔다는 입장이다. 농식품부 관계자는 “전업농과 달리 소규모 농장에서는 야생 멧돼지와 접촉하는 사육 돼지가 언제든 생길 수 있는 상황이어서 한돈협회에서 오해했던 부분을 모두 해소했다”며 “이견이 있는 부분에 대한 협의가 끝났기 때문에 법사위가 열리면 곧 통과될 것”이라고 전했다.
다만 문제는 ASF가 야생 멧돼지에서 지속해서 발생하고 있다는 점이다. 현재까지 ASF 확진 판정을 받은 야생 멧돼지 수는 총 66건이다. 연천군(26건), 파주시(22건) 등 경기 북부 지역과 철원군(17건), 화천군(1건) 등 강원 지역에 집중됐다. 야생 멧돼지에서의 바이러스 감염 건수는 지난해 10월9일부터 확산이 멈춘 사육 농가에서의 발생 건수(14건)를 훌쩍 넘어선 지 오래다.
야생에서의 ASF 발생이 수그러들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재입식 절차를 밟기 위한 위험 평가를 진행하는 것 자체가 방역 정책에 혼선을 줄 수 있다고 당국은 판단한다. 농식품부 관계자는 “집돼지에서의 발생은 더 이상 없지만, 멧돼지에서의 전염병 발생 빈도가 잦아지고 있어 언제든 집돼지에게로 전염될 수 있는 상태로 본다”며 “(발표 시기를) 계속해서 검토하고 있는 단계”라고 밝혔다.
농식품부에 따르면 위험 지역인 파주, 연천 등에서는 토양, 수질과 같이 야생 멧돼지가 거쳐 갔던 환경에서도 ASF 바이러스가 10회 검출됐다. 바이러스의 전파 경로가 명확히 규명되지 않은 상황이어서 모든 가능성에 대한 철저한 방역을 최우선 방침으로 두고 있다. 멧돼지에서의 발병이 멈추고 있지 않은 가운데 농가 한 곳이라도 돼지를 다시 들였다가 바이러스가 농장으로 다시 전파되는 것이 최악의 시나리오다.
결국 방역을 위해 기르던 돼지를 살처분한 농가가 재입식을 하든, 폐업하든 둘 중 하나를 결정할 수 있는 시점은 요원한 상태라고 볼 수 있다. 정부는 지난달 10일 가축전염병예방법 시행령을 고쳐 재입식이 늦어지는 농가에 대한 생계안정자금의 지원 기간을 6개월 이상으로 연장했다. 지원 한도는 통계청이 추산한 전국 축산 농가의 평균 가계비를 기준으로 ASF가 국내에서 처음 발생한 9월16일까지 소급 적용한다.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농가에서의 추가 발생이 멎은 지 석 달이 가까워지는 시점에서 재입식을 위한 기본 절차조차 시작하지 못하고 있는 데 대해 방역 당국을 질책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정승헌 건국대 축산학과 교수는 “살처분 농가에 입식을 제한한 지 오랜 기간이 지나면서 축산업에 상당히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다”며 “적어도 집돼지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정부가 해 온 방역 조치와 함께 역학(질병의 원인에 관한 연구) 조사 결과를 발표해야 농가와 지방자치단체도 향후 대응 방향을 정할 수 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축산 업계에서는 사실상 재입식이 무기한 연기된 시점에서 생계안정자금 외에 경영 손실에 따른 보상금을 별도로 지급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하태식 한돈협회장은 “돼지 사육 두수가 1800두를 넘는 전업농에는 지급되는 생계안정자금이 67만원뿐”이라며 “멧돼지에서의 추가 발생이 언제까지 계속될지 예단할 수 없는 시점에서 발생 농가가 아닌데도 예방적 차원에서 희생을 감수한 농가들에 대한 별도의 지원이 절실하다”고 했다. 하 회장은 “정부에서 재입식에 대한 어떠한 매뉴얼도 제시하지 않고서 농가들로 해금 마냥 기다리라는 것은 방책이 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이종혁 기자

저작권자 © 경기매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